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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혜정 Aug 30. 2024

나에게만 일이 몰려 억울한가요?

기회의 <마태효과>

 사회 경제학적 용어인 마태효과(Mattew effect)는  '부자는 점점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점점 더 가난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부익부 빈익빈, 승자 독식, 눈덩이 효과, 낙수 효과, 후광 효과, 슈퍼스타 효과 등 많은 대체어를 가지고 있요. 이 불평등 효과과학, 정보, 문해력, 교육학 등 다방면에서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마태효과라는 용어는 어디서 따온 것일까? 마태라는 학자의 이름을 붙인 것일까요? 신약의 출발, 마태복음과 관련이 있는 걸까? 혹시 세리 마태의 특성이 반영된 것은 아닐?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 25:29).


 마태효과 용어의 출처 성경의 마태복음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주인이 타국으로 떠나면서 세 명의 종에게 각각 5 달란트, 2 달란트, 1 달란트의 돈을 맡깁니다. 몇 년뒤, 첫 번째  종은 5 달란트를 10 달란트로, 두 번째 종은 2 달란트를 4 달란트로 맡 돈을 2배 려 놓았습니다. 반면 세 번째 종은 1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다가 그대로 다시  가지고 습니다. 주인은 첫 번째, 두 번째 종에게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크게 칭찬했고 세 번째 종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크게 책망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 지점입니다. 돈을 증식해야 한다는 지시도 없었고, 주인의 재산에 큰 손해를 입힌 것도 아니거든요. 1 달란트를 잘 보관하였다가 정직하게 다시 꺼내 놓은 것뿐인데 악평을 받게 되다니 날벼락인가? 게다가 다른 종들과 차별적으로 적은 액수  놓고는 이제 와서 불호령이라니 종의 입장에 여간 억울한 일이 아닙니다. 


 이번엔 주인과 종의 입장을 살짝 바꾸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종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령, 학생들의 실력 향상에 대한 '기대치'가 있는 교사가 얼마간 현장을 떠나 있어야 하는 동안 제자들의 학습 공백을 매우기 위해 각자의 수준에 맞게 교재와 비법서를 손에 쥐어 주었다고 가정해 볼까요? 이를 단순히 에 대한 물리적인 소유 이전으로 해석하기는 어렵습니. 교사는 자신의 부재 기간 동안 제자들 성장에 대해 기대하며 각자의 능력치에 따라 고민 고민을 거듭하여 책을 선별했을 것입니다. 그의 의도는 책의 위탁 자체가 아닌 성장의 기회 전달이었. 몇 년 후 반갑게 제자들과 재회했을 때, 마음을 담아준 책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실력을 갈고닦아 저만치 앞서 가고 있는 학생과, 교재 비법서를 들춰보지도 않고 땅에 묻어 두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학생에게 스승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폭풍 칭찬과 폭풍 실망이 아닐까 싶어요. 열심히 노력하여 기대에 부응한 제자에게는 큰 인정을, 그동안 자신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 마음과 의도를 외면한 채 몇 년간 학습을 멈춘 제자에게는 큰 실망을 했을 것입니. 바로 애정과 기대치가 있 때문입니다. 




 때론 그런 애정과 기대가 부담스럽고 버거울 때가 있습니다. 뭘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어때라는 항변을 하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나설 테니 조용히 그리고 편하어가고 싶은 생각이랄까. 이것이 바로 링겔만 효과, 프리라이더(무임승차) 효과입니다. 구성원이 많을수록 팀 과업에 참여도가 낮아진다는, 단체의 규모와 개인의 기여도 간 역관계설명해 주는 용어이죠. 힘들게 선봉장이 되기보다 뒤로 물러나서 남들이 차려준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 무리은 어느 모임에나 있기 마련입니. 얌체을 작정하지 않더라도 수자타산 따져보고 적당 거리를 유지하는 것영리한 장사일 수 있습니다. 효율성과 실리가 주도하는 현대 사회에 헌신과 희생, 배려와 손해는 선택지에서 점점 밀려나고 있 것이 사실입니. 헌신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모임별로 비율과 정도는 다를 수 있습니다. 관례상 단체 과업의 종료 시점에서 감사의 한 마디로 땀과 수고를 아끼지 않은 소수를 치하해 주기도 합니다.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을 기여 부재 이 짧은 시간은 부채의식을 말끔하게 털어내는 의식이 되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이끌어 가고, 누군가는 따라가는 것이 당연한 모임의 질서입니다. 그래도 팔로우 리더십을 발휘하여 주면 힘이 나서 신나게 으샤으싸  할 수 있습니다. 그 인원이 적으면 힘이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 문제이죠.


 개인적으로 이해득실을 따져보고 민감하게 계산하며 움직이지 못하다 보니 뺏기는 에너지가 많습니다. 냉정하게 거절하거나 적절한 선에서 차단하지 못하는 미련함도 한몫합니다. 내가 좋아서 하거나, 다른 이들을 위해서 하거나, 나눔을 위해서라는 명목 하에 결국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 되거나, 선택지는 셋 중 하나입니다. 안타깝게도 한도 초과로 휘청거리는 나뿐만 아니라 적선에서 발뺌을 하면서도 얻을 것을 챙겨가는 사람들 눈에 들어옵니. 그러다 보면 손해의식 빼꼼히 머리를 내밀죠. '왜 나는, 그런데 왜 너는?' 하고 더하기 빼기의 공식에 대입하는 순간,  쪽의 마이너스 통장이 점점 커 보이고 상대에게 상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기까지 합니다. 특히나 불균형한 기여도가 반복될 때 더 그렇. 그렇다고 직접적인 비난과 감정적인 불만 토로만이 정답일까? 감사와 치하가 차오르는 동력이 될 수 없을 만큼 밑 빠진 독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감정의 허비로부터 나를 건지는 방법은 없을까?


 '청지기'라는 말을 새김질해 봅니다. [교회용어사전]에서 정의하는 청지기는 주인(소유자)이 맡긴 것들을 주인의 뜻대로 관리하는 위탁인입니. 즉, 내게 맡긴 것을 주인의 유익을 위해, 주인이 원하는 데로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유익을 위하거나 나의 뜻대로 운용하 자는 진정한 청지기가 아닙니다. 맡겨진 것은 단순 돈만이 아니에요. 은사, 재능, 건강, 시간 등 삶의 모든 영역을 망라합니다. 실오라기 걸치지 않은 채 벌거숭이 아기로 탄생한 이후, 현재 나에게 입혀지고 발견되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은 일방적으로 주어지고 맡겨졌습니다. 나의 것이라 생각하지만 폐로 첫 호흡을 시작한 순간부터 나의 소유는 부재했습니다. 들이마신 공기조차 내 것이 아니었.




 현대인들은 바쁘고 또 바쁩니다. '나'의 시간에 따라 '나'의 건강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게 '나'의 능력과 '나'의 계획에 따라 '나'의 것(재정, 학업, 경력 등)을 관리하고 개발하고 확장해 가는 '나'의 삶을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나'의 삶에 겹쳐지는 우리의 삶이 '나'의 이익에 큰 이득이 아니면 '굳이 내가?'라는 카드를 내밀며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나'의 것에 더욱 에너지를 집중할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나의 것을 내려놓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일이 몰릴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어버립니다. 일이 일할 사람을 찾아간다는 말처럼. 세상의 안경을 끼고 보면 바보 같은 헌신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안경으로 갈아 끼우면 그야말로 기회의 마태효과입니다. 나에게 맡겨진 재능, 은사, 시간, 돈, 노력을 계속해서 주인의 유익을 위해, 그리고 주인이 원하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기회가 늘어나는 것이 때문입니.


 오로지 '나'의 유익에 집중된 삶은 허울뿐인 청지기로 맡겨진 것을 땅에 묻어 두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주어진 것이 내 것이라는 전제 비교와 불만을 싹 틔웁니다. 하지만 내 것이 아니면 내려놓는 여유와 품이 생겨납니. 물론, 저 역시 내 것이라 움켜쥐고 나를 위해 사느라 궤도에서 벗어난 적도 많습니다. 또한 모임의 종류에 따라 헌신도가 달랐던 지난날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어떤 경우는 리더로, 어떤 경우는 팔로우 리더로, 또 어떤 경우는 그저 숟가락만 얹었을 수도 있습니다. 역할과 관점의 차이입니다.


 우선, 품에 안은 것이 내 것이 아니라 맡겨진 것이라는 인식의 전환 있다면 맡겨진 것을 원래의 뜻대로 사용하며 점점 불려 나갈 수 있는 기회주어진 것에 불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저 감사 받고 성장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 잘못하다가 '내가 준 것을 널 위해서만 썼느냐?'라는 큰 책망을 받을 수 있습니. '내가 준 것을 잘 나누어 쓰며 크게 성장했구나. 잘하였.'는 칭찬을 받길 기대한다일상에서 주어지는 기회의 마태효과를 잘 활용할 힘이 생겨납니다. 


 어떤 일이든 당장은 손해 듯해도 끝내고 뒤돌아 보면 피와 살이 되는 경험많이 해보셨을 거예요. 나로 꽉 찬 좁은 공간에서 땅을 깊이 파는 것보다 나에게 벗어나 너를, 그리고 모두를 아우르며 넓어지는 과정은 힘들지만 분명 나의 폭 넓어지는 성장의 기회입니. '일은 왜 나만 따라다닐까?' 하며 숨이 턱턱 막히고 억울함에 지칠 때, 기회의 마태효과를 떠올려보세요. 넓어지려면 찢어져야 합니다. 어쩌면 성장 시작되고 있다 증거일지 모릅니다. 저 멀리 훌쩍 커있을 나를 기분 좋게 상상하며 기회의 마태효과를 누려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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