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경제학적 용어인 마태효과(Mattew effect)는 '부자는 점점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점점 더 가난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부익부 빈익빈, 승자 독식, 눈덩이 효과, 낙수 효과, 후광 효과, 슈퍼스타 효과 등 많은 대체어를 가지고 있지요. 이 불평등 효과는 과학, 정보, 문해력, 교육학 등 다방면에서 사용됩니다. 그렇다면마태효과라는 용어는 어디서 따온 것일까요? 마태라는 학자의 이름을 붙인 것일까요?신약의 출발, 마태복음과 관련이 있는 걸까요? 혹시세리 마태의 특성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요?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 25:29).
마태효과 용어의출처는성경의 마태복음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주인이 타국으로 떠나면서 세 명의 종에게 각각 5 달란트, 2 달란트, 1 달란트의 돈을 맡깁니다. 몇 년뒤, 첫번째 종은 5 달란트를 10 달란트로, 두 번째 종은 2 달란트를 4 달란트로 맡은 돈을 2배로불려 놓았습니다. 반면 세 번째 종은 1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다가 그대로 다시 가지고 왔습니다. 주인은 첫 번째, 두 번째 종에게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크게 칭찬했고 세 번째 종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크게 책망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지점입니다. 돈을 증식해야 한다는 지시도 없었고, 주인의 재산에 큰 손해를 입힌 것도 아니었거든요. 1 달란트를 잘 보관하였다가 정직하게 다시 꺼내 놓은 것뿐인데악평을 받게 되다니 왠 날벼락인가요? 게다가 다른 종들과 차별적으로 적은 액수를맡겨 놓고는 이제 와서 불호령이라니종의 입장에서여간 억울한 일이 아닙니다.
이번엔주인과 종의입장을 살짝 바꾸어 생각해 보겠습니다.주종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령, 학생들의 실력 향상에 대한 '기대치'가 있는 교사가 얼마간 현장을 떠나 있어야 하는 동안 제자들의 학습 공백을 매우기 위해각자의 수준에 맞게 교재와 비법서를 손에 쥐어 주었다고 가정해 볼까요?이를 단순히책에 대한 물리적인 소유권 이전으로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교사는자신의 부재 기간 동안제자들의 성장에 대해 기대하며 각자의 능력치에 따라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여 책을 선별했을 것입니다. 그의 의도는 책의 위탁 자체가 아닌 성장의 기회전달이었죠.몇 년 후 반갑게 제자들과 재회했을 때, 마음을 담아준 책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실력을 갈고닦아 저만치 앞서 가고 있는 학생과, 교재나 비법서를 들춰보지도 않고 땅에 묻어 두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학생에게 스승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폭풍 칭찬과 폭풍 실망이 아닐까싶어요.열심히 노력하여 기대에 부응한 제자에게는 큰 인정을, 그동안 자신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 마음과 의도를 외면한 채 몇 년간학습을 멈춘 제자에게는 큰 실망을 했을 것입니다.바로애정과 기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론 그런 애정과 기대가 부담스럽고 버거울 때가 있습니다. 뭘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어때라는 항변을 하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나설 테니 조용히 그리고 편하게 묻어가고 싶은 생각이랄까요. 이것이 바로링겔만 효과, 프리라이더(무임승차) 효과입니다. 구성원이 많을수록 팀 과업에 참여도가 낮아진다는,단체의 규모와 개인의 기여도 간의역관계를 설명해 주는 용어이죠. 힘들게 선봉장이 되기보다 뒤로 물러나서 남들이 차려준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 무리들은 어느 모임에나 있기 마련입니다. 얌체족을 작정하지는 않더라도 수자타산을따져보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영리한 장사일 수 있습니다. 효율성과 실리가 주도하는 현대사회에 헌신과 희생, 배려와 손해는 선택지에서 점점 밀려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헌신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모임별로 비율과 정도는 다를 수 있습니다. 관례상 단체 과업의종료시점에서감사의 한 마디로 땀과 수고를 아끼지 않은 소수를 치하해 주기도 합니다.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을기여부재자들에게 이 짧은 시간은 부채의식을 말끔하게 털어내는 의식이 되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이끌어 가고, 누군가는 따라가는 것이 당연한 모임의 질서입니다.그래도팔로우 리더십을 발휘하여 주면 힘이 나서 신나게 으샤으싸 할 수 있습니다. 그 인원이 적으면 힘이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 문제이죠.
개인적으로 이해득실을 따져보고 민감하게 계산하며 움직이지 못하다 보니 뺏기는 에너지가 많습니다. 냉정하게 거절하거나 적절한 선에서 차단하지 못하는 미련함도 한몫합니다.내가 좋아서 하거나, 다른 이들을 위해서 하거나, 나눔을 위해서라는 명목 하에 결국 내가 좋아서하는 일이 되거나, 선택지는 셋 중하나입니다. 안타깝게도 한도 초과로 휘청거리는 나뿐만 아니라 적당선에서 발뺌을 하면서도 얻을 것을 챙겨가는 사람들도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다보면 손해의식이 빼꼼히 머리를 내밀죠. '왜 나는, 그런데 왜 너는?' 하고 더하기 빼기의 공식에 대입하는 순간,내 쪽의 마이너스 통장이 점점 커 보이고 상대에게 상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기까지 합니다. 특히나 불균형한 기여도가 반복될 때 더 그렇죠. 그렇다고 직접적인 비난과 감정적인 불만 토로만이 정답일까요? 감사와 치하가 차오르는 동력이 될 수 없을 만큼 밑 빠진 독이 되어버린 상황에서감정의 허비로부터 나를 건지는 방법은 없을까요?
'청지기'라는 말을 새김질해 봅니다. [교회용어사전]에서 정의하는 청지기는 주인(소유자)이 맡긴 것들을 주인의 뜻대로 관리하는 위탁인입니다. 즉, 내게 맡긴 것을 주인의 유익을 위해, 주인이 원하는 데로 관리하는 사람입니다.그렇다면나의 유익을 위하거나 나의 뜻대로 운용하는 자는 진정한 청지기가 아닙니다.맡겨진 것은 단순히 돈만이 아니에요. 은사, 재능, 건강, 시간 등 삶의 모든 영역을 망라합니다. 실오라기 걸치지 않은 채 벌거숭이 아기로 탄생한 이후, 현재 나에게 입혀지고 발견되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은 일방적으로 주어지고 맡겨졌습니다. 나의 것이라 생각하지만 폐로 첫 호흡을 시작한 순간부터 나의 소유는 부재했습니다. 들이마신 공기조차 내 것이 아니었죠.
현대인들은 바쁘고 또 바쁩니다. '나'의 시간에 따라 '나'의 건강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게 '나'의 능력과 '나'의 계획에 따라 '나'의 것(재정, 학업, 경력 등)을 관리하고 개발하고 확장해 가는 '나'의 삶을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나'의 삶에 겹쳐지는 우리의 삶이 '나'의 이익에 큰 이득이 아니면 '굳이 내가?'라는 카드를 내밀며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나'의 것에 더욱 에너지를 집중할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나의 것을 내려놓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일이 몰릴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어버립니다. 일이 일할 사람을 찾아간다는 말처럼요. 세상의 안경을 끼고 보면 바보 같은 헌신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안경으로 갈아 끼우면 그야말로 기회의 마태효과입니다.나에게 맡겨진 재능, 은사, 시간, 돈, 노력을 계속해서 주인의 유익을 위해, 그리고 주인이 원하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기회가 늘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나'의 유익에 집중된 삶은 허울뿐인 청지기로 맡겨진 것을 땅에 묻어 두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주어진 것이 내것이라는 전제는 비교와 불만을 싹 틔웁니다.하지만 내 것이 아니라면 내려놓는 여유와 품이 생겨납니다.물론, 저 역시내 것이라 움켜쥐고 나를 위해 사느라 궤도에서 벗어난 적도 많습니다. 또한 모임의 종류에 따라 헌신도가 달랐던 지난날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어떤 경우는 리더로, 어떤 경우는 팔로우 리더로, 또 어떤 경우는 그저 숟가락만 얹었을 수도 있습니다. 역할과 관점의 차이입니다.
우선, 품에 안은 것이 내 것이 아니라 맡겨진 것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있다면 맡겨진 것을 원래의 뜻대로 사용하며 점점 불려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에 불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저 감사로 받고 성장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죠. 잘못하다가'내가 준 것을 널 위해서만 썼느냐?'라는 큰 책망을 받을 수 있습니다.'내가 준 것을 잘 나누어 쓰며크게 성장했구나. 잘하였다.'는 칭찬을 받길기대한다면 일상에서 주어지는 기회의 마태효과를 잘 활용할 힘이 생겨납니다.
어떤 일이든 당장은 손해인 듯해도 끝내놓고 뒤돌아 보면 피와 살이 되는 경험을 많이 해보셨을 거예요. 나로 꽉 찬 좁은 공간에서 땅을 깊이 파는 것보다 나에게 벗어나 너를, 그리고 모두를 아우르며 넓어지는 과정은 힘들지만분명 나의 폭이 넓어지는성장의 기회입니다.'일은 왜 나만 따라다닐까?' 하며숨이 턱턱 막히고 억울함에 지칠 때, 기회의 마태효과를 떠올려보세요. 넓어지려면 찢어져야 합니다. 어쩌면 성장이 시작되고 있다는 증거일지 모릅니다.저 멀리 훌쩍 커있을 나를 기분 좋게 상상하며 기회의 마태효과를 누려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