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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혜정 Sep 09. 2024

빨간 머리 앤 100일간의 필사 완주

영어 필사 2기 졸업

 <어린 왕자>에 이어 두 번째  영어 필사 100일의 대장정 <빨간 머리 > 함께였다. 꽃피는 봄날에 시작되어 더운 여름을 지나 가을의 문턱 앞에서 마침표를 찍은 지난 5개월은 이제 하나의 추억이 되었다. 하루, 이틀이 지나 순식간에 100일을 채우다니, 날마다의 축척이 큰 덩어리 가슴을 채다.


 세상에 작은 일이란 없다. 작보여도 실은 크고 의미 있다. 봄의 설렘, 여름의 치열함, 가을의 기다림 등 계절의 변화를 오롯이 끼는 하루가 모여 일상이 되고, 일상이 모여 삶되었다. 혼자가 아니었기에, 함께였기에 그냥 흘러갈 수 있는 잉여의 시간 밀도 있는 친교와 유대감이라는 모양으로 빚어졌다. 서로에게 붙여준 '앤님들'이란 말이 얼마나 정겨웠던지.


 개인적으로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영어 필기체의 재미에 빠졌던 것 같다. 중간 지점에 이르러서는 필사벗 늘품님 덕분에 붓펜으로 캘리 끄적였고 만년필 세계에 기웃거리기도 했다. 붓글씨를 좋아했던 어린 시절부터, 캘리에 관심이 많았던 젊은 날이 떠올라 나중에라도 꼭 이 두 가지를 내 품에 다시 안으리라 다짐도 해다. 새벽에 문을 열어 저녁에 문을 닫는, 아니 24시간 오픈되어 있던 필사방의 다채로운 생각 나눔, 마음 챙김이 필사벗들에게도 의미 있는 시간이었길 진심으로 바다. 

 영어 필사를 통해 앤님들 각자가 가져간 경험은 다르겠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자기 발견'과 '정겨운 대화'의 시간이 아닐까 한다. 그저 '영어'를 그대로 옮겨 쓰는 기계적인 작업이 아니라 질문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성찰하며, 같은 질문에 대한 다른 생각과 관점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내가 더 넓어지는 풍성함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그랬다.


 좋은 문장을 채집하고 복용하던 글쓰기 초창기 시절을 떠올리며 문장 채집통을 마련해 드렸더니 나날이 게을러지는 나와 다르게 꿋꿋이 채집통을 채워가는 앤님들의 성실함에 탄복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쪼르륵 올라온 글들에 함께 웃고 함께 울며 토닥여주는 일상의 리추얼이 멈추어선 공백이 허전하지 않게, 따스한 여운으로 남길 바라는 마음에 단출한 졸업식과 시상식을 마련했다. 온라인, 아니 카톡방에서만 진행되는 한계적인 의식이었지만 시상식을 위해 한 명 한 명을 생각하며 투표를 진행하고, 상장을 만들고, 선물을 보내며 지난 시간에 대한 감사와 아쉬움 꾹꾹 눌러 담았다. 끝까지 완주하신 분들도, 중간에 멈춰 섰지만 자신의 속도로 필사 완주를 다짐하신 분들도, 어떠한 사정으로 당분간은 필사가 힘든 분들도 모두 괜찮다. 완주도, 미완주도 모두 옳다. 인생에 하나의 정답은 없으니까.

 

 우리 삶에 많은 인연이 들고 난다. 품고 싶어도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생각지도 않았는데 옆을 지키고 있는 이들도 있다. 그 관계의 지속과 밀도는 차이가 있지만 누군가와 무엇을 '함께' 하는 것은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머릿속에 그리고 가슴 안에 각인된다. 말하지 않아도, 표현하지 않아도 그때 그 시간에 대한 기분 좋은 떠올림이면 족하다. 인생의 어느 구간에서 만나 빨간 머리 앤과 함께 걸으며 나눈 100일의 시간들이 앤님들에게 따스한 기억으로 남으면 좋겠다.


 출간한 책으로 영어필사를 함께 하고 싶었던 나의 작은 꿈을 이루어주신 2기 영어 필사벗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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