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한 시간을 강연하기 위해 지난 수십 년을 살아왔습니다. 제가 살아온 수십 년을 한 시간에 요약해 주는데 그게 비싼 건가요?"
역시 김종원 작가다.그의 멋들어진 자존감에 문득 내 인생값을 떠올려 본다.허영 내지는 허탈에 허우적댈 수 있는 산술적 수치 말고, 참값을 도출하기 위한 키워드가 중요하다.내 삶은 과연 어떤 단어로 요약될 수 있을까?
평균 수명 100세 시대, 그 절반의 언저리에 서있다. 결코 올 것 같지 않았던 중년의 초입이다. 내가 평균값의 수혜자가 될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다. 그저 살포시 긍정을 얹어보면 지금껏 살아온 날과 앞으로 살아갈 날의 무게추가 어느 쪽으로도 크게 기울지 않는 시기로 진입하고 있다.
중년은 청년과 노년의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아 뚜렷한 윤곽선이 없는, 중간에 끼어 어정쩡하다 못해 밋밋한 구석이 있는 시기이다. 융의 말을 빌리자면 멀쩡한 듯 보여도 불현듯 마음에 지진이 일어나는 것 또한 마흔의 때다. 세월이 싣고 가버린 청춘에 대한 아련함과 생의 끝을 직면해야 하는 불안감이 혼재되어 어쩌면 더 자주 흔들릴 수 있는 것이 사십 대일지 모른다.
질병에서도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질병이라는 불청객의 거침없는 행보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폭격하는 테러 혹은 불의의 사고와 닮아있다. 생물학적 나이, 사회적 지위, 경제적 부라는 거름망을 통과하는 법이 없으며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채, 무방비 상태로 타격을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차별적인 공격에 대항할 체력이 청년기에 비해 확연히 떨어진다. 그저 목표물이 될 확률을 떨어뜨리기 위해 애쓰는 게 고작이다. 희생물이 되지 않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
청년의 때에 나는, 남보다 앞서는 것이 갈채받는 속도의 시공계에 살았다.
전. 력. 질. 주.
속도가 주는 쾌감으로 방향을 생각하지 못했다.숨 가쁜 속도전에서 이리저리 치이기도 했다.대학 졸업, 취업, 결혼, 출산, 육아 등 줄줄이 늘어선 과업의 단계들이 삶을 정의했다.동일한 사이클 안에서 사람들과 엎치락 뒤치락 속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내가 너 나이만 돼도 고민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시도했을 거야."
이제 갓 회사를 입사한 나에게 28살의 언니가 했던 말이다.방향 앞에 속도의 압승이다.아니, 속도가 먼저인 세대에 방향의 대패(大敗)이다.방향을 모른 채 방황하는 풋풋한 20대는 대체 누가 만들어 놓은 어떤 기준에 의해 자신의 열정을 잠식당한 것일까?
속도전에 지쳐 멈춰 섰다.오랜 시간 끝에 방향이 보였다.속도를 포기할 용기도 생겼다. 결국, 모든 것에서 나는 남들보다 조금 늦어졌다.교직도, 결혼도, 출산도, 글쓰기도...늦깎이 교사, 늦깎이 아내, 늦깎이 엄마, 늦깎이 작가.늦깎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니 왠지 숙연해진다.
성격이 급한 나는, 인생의 속도에 제동이 걸리면서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을 알게 되었다.물론, 타고난 천성에 붙들려 여전히 미련함을 반복하고 있다.하지만 무게 중심은 생겼다.
조금 늦어도 괜찮다.어차피 인생에 지각이란 없으니까.'지각'이라는 판단을 하는 순간 내 인생의 기준점이 타인에게 넘어간다.그러지 말자.각자의 인생에 기준은 각자이다.인생을 걸어가는 속도는 모두가 다르다.
나는 내 삶을 건너뛴 적도, 소홀히 대한 적도 없다.단지, 여기저기 둘러 오느라 특정 목적지 도달이 늦었을 뿐이다. 빠르게 직행했으면 들르지도 못했을 정류소에서 수많은 삶의 요체들을 찾아 인생 주머니에 담느라 늦었다. 그래서인지 늦어서 아쉬운 것보다 늦더라도 도달하게 되어 감사다.
늦깎이 인생. 경쾌함, 완벽함, 말끔함, 세련됨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물질세계의 경직성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아 소신 있다.결코 가벼워 보이지도 않는다.멈추지 않는 은근한 동력도 장착한 듯하다.생의 여기저기서 묻혀온 흔적들로 채워 나름 볼록한 모양새를 갖춘 느낌,이만하면 충분히 매력적이다.
나는 늦깎이 인생을 살아간다.하지만 결코 지각은 아니다.다른 삶의 여정을 더 채워온 것일 뿐, 내 인생 시간의 기준점은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살아보니 나쁘지 않다.어차피 늦었으니 속도전에서 자유롭다. 자유롭게 천천히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