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안방의 고장 난 에어컨을 대신해서 새로운 에어컨을 설치했다. 하필 새로 설치한 에어컨이 잘못되어 더운 바람이 나오는 바람에 또 일주일을 기다렸다가 재설치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한여름에 열흘정도 에어컨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내가 에어컨 바람을 안 좋아했으니 망정이니, 에어컨없이도 며칠 정도는 여름을 견딜 수 있는사람이라 다행이지... 아마 다들 진작에 도망쳤을 것이다. 사실 나는 이번 여름 에어컨을 고치지 않고 넘어갈 생각도 있던 사람이라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덥기는 정말 더웠다. 집에서는 가진 옷 중에 가장 얇은 옷을 입고 지내는데도 불구하고, 이 옷도 훌훌 벗어버리고 속옷만 입고 다니고 싶을 정도로 덥긴 했다. 올여름 더위가 대단하다.
에어컨이 설치된 이후에 에어컨을 수시로 틀며 지내다 보니, '나는 더위를 타지 않는다' '에어컨 없이 살 수 있어'라는 말은 이젠 더 이상 못하겠다. 요즘처럼 더운 날에는 집안에서 조금만 왔다 갔다 하면 다시 땀범벅이 되기 일쑤이다. 아침에 우리 집은 시원하기 때문에(다른 집에 비해) 일어나 볼일 좀 보다가 천천히 씻는 편인데씻은 후에도 집안일을 좀 하고 있으면 금세 더워진다. 다시 땀이 줄줄...
주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출근을 한다. 특히 출근을 준비하는 시간이 가장 더운 시간이다. 특히 문제는 화장을 할 때이다. 선크림 바르고 파운데이션을 톡톡 발라 찍어야 하는데 그전에 이미 화장이 무너진다. 화장을 하는 의미가 없이 순식간에 찍어 바르고 마무리한다. 그냥 빨리 에어컨 천국으로 출근해야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나는 시점이다.
차라리 에어컨을 켜고 화장하지 그래? 하겠지만 그 잠깐 때문에 에어컨을 켜기에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고, 곧 가서 에어컨의 추위 속에서 헤엄치게 될 텐데 굳이 지금부터 에어컨을 쐬고 싶지 않다. 특히 에어컨을 한참 쐬며 얼음이 가득 들어간 커피를 마시며 수업하다가 목이 가버린 이후는에어컨을 적당히 쐬야겠다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더위에는 반드시 출근을 해야 한다. 출근을 해야 하는 이유 중에는 자아실현, 돈 등등의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 지금 반드시 가야 할 단 하나는 바로 여름이기 때문이다.
안방에 에어컨 없이 열흘이 넘는 시간을 보내고 나니 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다. 사실 내가 에어컨이 고장 나도 견딜 수 있던 것은 더위를 덜 타서가 아니라 출근만 하면 에어컨 천국에서 지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오전은 조금 더우니 참을 수 있었고, 그 후에는 출근을 할 테니 에어컨 천국에서 오후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해 에어컨... ㅠㅠ
출근길 가장 먼저 만나는 에어컨 천국은 차 안이다. 출근하는 차 안에서 에어컨을 튼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운전을 하면 왠지 여행 가는 기분이 들고 그렇기도 하다. 사실 제주의 도로 분위기는 거의 휴양지, 혹은 자연 그 자체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다 보면 순식간에 일터에 도착한다.
그 후 나는 에어컨 천국에서 일을 한다. 더위로 인한 화나 짜증은 이미 에어컨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마치 지금 계절이 여름인걸 모를 정도로 시원하다.
아무리 말을 해도, 수업 중에 움직여도 내게 땀 한 방울 흐르지 않는다. 이미 그전에 차가운 에어컨 바람에 증발 돼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혼자 이렇게 쐬는 에어컨은 왠지 모를 죄책감에(환경을 생각하지 않는다던지...) 휩싸일 텐데 나 말고도 여럿이 쐬는 에어컨이라 더욱 좋은 것 같다.
심지어 퇴근이 가까워오는 마지막 시간이 되면 에어컨 바람에 추울 지경이다. 그러면 잠시 에어컨을 끄고 자연 바람을 기다린다.
분명 여름에 에어컨 천국에서 일을 하는 것은 호사다 호사. 역시 내가 돈 벌러 나오길 잘했다는 순간을 때때로 느끼게 된다.
물론 퇴근길 야외에 세워진, 열로 가득 찬 차에 타면 금세 현실로 돌아오곤 한다. 또 더위와 싸우러 가야겠군... 이런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