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된 날
몇 달 전 온 집안의 전기가 나갔었다. 그러나 몇 분 후 다시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다행이었다.
제주의 우리 집은 비가 샌다. 비가 새는 집인 줄 알았더라면 당연히 계약을 안 했겠지만
들어와서 알았다. 게다가 이미 3년이나 살았다. 살다 보니 비가 새는 범위나 양이 점점 늘어나 작년엔 방수공사를 했는데도 집에 물이 샌다. 내 돈도 아닌 공사비용이 아까웠지만 그래도 방수공사를 한 이후로는 물이 덜 새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물이 새는 것보다 문제였던 것은 비가 올 때 2층 거실 불을 켜면 전기 차단기가 내려가는 것이었다. 비가 새는 것보다 전기가 내려가는 것이 더 스트레스였다. 그래도 쓰지 않는 구역의 전기가 나가는 것이라 그렇게 큰 불편함은 없었다.
가까운 나라로 여행을 다녀왔다. 새벽 2시에 비행기를 타고 아침 일찍 제주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자긴 잤지만 여행 직후라 몸이 정말 피곤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했다. 아이에게 아침을 먹이고 곧바로 학교를 보냈다.
그리고 비몽사몽 한 상태로 세탁기를 돌리고 남편에게 아침을 차려주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중간에 다시 깨서 다시 세탁기에 있는 옷을 건조기로 넣어놓고, 어두운 색을 다시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 그런 후에 다시 잠이 들었는데 띠리리링 하는 건조기 꺼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잠결에 벌써 건조기가 다 돌아갔나? 하는 생각을 하며 잠들었다.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점심때가 돼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그리고 세탁기를 눌렀는데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거실에 갔더니 세상 조용하다. 냉장고도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아 열어보니 불이 꺼져있다. 돌려놓은 세탁기 안에도 세탁물과 물이 가득 차있었다.
정전이었다.
우리 동네에 모든 집에 정전이 되었는지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우리 집만 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정전이 된 집이었다. 가장 먼저 한국전력에 신고를 했다. 그러나 요즘 강풍과 비 때문에 제주도 전 지역에 정전된 곳이 많아 언제 수리하러 올지 모르겠다고 했다. 일단은 기다려보기로 했다.
정전이 되니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정전이 되며 보일러가 꺼져버렸다. 여행을 다녀와서 이미 차가워진 집이 더 이상 데워지지 않고 냉골을 유지하고 있었다. 추워... 처음엔 조금 추운 정도로 버텼지만 그 후로 점점 더 추워졌다.
집이 밝은 편이 아니라 평소에도 불을 켜고 지내는데 어제는 날씨가 흐려 집이 더 어두워졌다. 불도 제대로 못 켜고 바깥 불에 의지하고 지내려니 눈이 어두침침해졌다. 그것도 그나마 낮에는 다행이었다. 저녁이 되어가니 집안이 점점 어두워져서 깜깜해지기 시작했다.
전기가 끊겨 보일러가 돌아가지 않으니 집은 점점 싸늘하고 추워졌으며, 문제는 어제 여행을 다녀와서 씻지 못한 채로 잠이 들었는데 여태까지도 못 씻었다는 사실이다. 보일러가 돌아가지 않으니 찬물로 씻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인덕션을 사용하는 우리 집은 요리도 해 먹을 수가 없었다.
문제는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였다. 평상시에도 집이 추워 많이 입고 있는데 더 껴입었다. 그래도 아이가 '엄마 추워요'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카페라도 나가있어야 하나 싶었는데, 아이도 여행을 다녀와서 피곤한 터라 잠을 자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을 자는 방은 더 추웠다. 잠이 드는 아이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집은 싸늘하고 춥고, 거기다가 어두워지기 시작하니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집안에 초를 찾아 켜놨지만 넓은 집에 초 하나로는 역부족이었다.
여기서 포인트는 춥고, 어두워지는데 더 이상 배 고픈 것도 참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전기를 쓰지 못하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정전된 지 6시간 정도가 흘렀다. 이제 더 어두워질 테고 더 배고파질 것이다. 피곤에 지쳐 잠든 아이 곁으로 가보니 방 안의 공기가 차가워서 너무 서글퍼졌다.
일단 너무 배가 고파 밥이라도 먹으러 나가야겠다. 이제 집안도 더 깜깜해져서 플래시 없이는 앞이 보이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차를 타고 밥을 먹으러 갔다. 가까운 식당을 찾았다. 순대국밥을 파는 곳이었다. 따뜻한 식당에서 뜨거운 국물을 먹으니 내내 추웠던 몸이 녹는 것 같았다. 밥을 먹다가 거울을 봤는데 여행 후 씻지 못하고 자다가 추위에 떨다가 나온 내 모습을 보니 외계인 같았다. 너무 흉해서 얼굴을 들고 밥을 먹을 수 없었다.
밥을 먹고 나서는 호텔을 예약했다. 어차피 집은 추워서 더 이상 있을 수 없고, 잠도 잘 수 없었다. 보일러도 작동되지 않아 하루종일 씻지 못하니 불편했다. 게다가 고쳐주시는 분들은 언제 오실지 모르니 언제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내일 학교에 갈 아이의 가방과 옷을 챙겨 호텔로 향했다. 5분 거리에 가까운 곳에 호텔이 하나 있는데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내일 아침 아이 학교를 보내려면 가까운 곳이 최고일 것 같았다. 며칠을 호텔에서 자고 왔는데 또 호텔을 가려니 그렇게 반갑지 않았다. 가까운 호텔을 가려니 저렴하지도 않았다. 돈이 아까웠다. 울며 겨자 먹기로 체크인을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드디어 정전을 해결해 줄 전화가 왔다. 고쳐주시는 기사님들이 한 시간 내로 도착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시각은 8시 반이다. 그래서 다시 짐을 들고 체크아웃을 하고 돌아왔다.
호텔에 사정을 말하고 취소를 하고 돌아오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집에 도착해 보니 이미 전선을(?) 고치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여전히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고 바람도 조금 불고 있었다. 비 오는데 바람까지 부는 데다가 겨울이니 추웠을 것이다. 그 와중에 높은 곳에 올라가 정전을 해결하고 계시는 기사님들은 보니 죄송스러운 마음이었다.
하필 제주 전 지역이 난리라 쉬지 못하고 일하고 계신다고 하셨다. 나도 1시 즈음 예약을 했는데 9시가 돼서야 만날 수 있었으니 분명 종일 이런 상태로 일하셨을 것이 분명했다.
한참을 걸려서야 드디어 집안에 불이 켜졌다. 절로 박수가 나왔다. 정말 감사했다.
불이 켜진 집에 들어왔다. 9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일단 보일러부터 켰다. 그리고 거실에 히터를 켜고, 아까 덜 된 빨래와 건조기를 작동시켰다(물론 하나씩) 그리고 보일러를 온수로 바꿔서 드디어 씻을 수가 있었다.
냉장고가 다시 작동하는 것을 확인하고, 따뜻한 물을 끓였다.
사실 그동안 몰랐다. 전기가 없는 곳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겨우 8시간 전기 없이 살았는데 이토록 불편하다니 그리고 전기가 이토록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니 정말 장할 뿐이었다. 정전이 되고 나서야 알게 된 소중함이다.
얼마 전엔 하수관이 또 막혀서 세탁기를 며칠 사용할 수 없었고, 이번에는 정전이 되어 전기를 사용할 수 없어서 집의 모든 것이 작동되지 않았다.
잃게 되지 않았으면 절대 알지 못했을 소중한 것들.
앞으로는 누리고 있는 것에 당연함을 감사한 마음으로 사용해야겠다.
그리고 다시는 겨울에 정전이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