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세이
엔딩 크레딧의 배경음악을 들으며 한참을 앉아있었다. 영화가 어려워서 멍하니 있는데 들려오는 음악이 너무 좋다. 이 영화 속에는 음악이 거의 없다. 그래서인지 배우들의 표정과 대사가 현실처럼 선명하다.
영화 속 무대는 이승도 저승도 아닌 중간 세계. 망자들은 이곳에서 머무르는 동안 3일 이내에 각자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선택해야만 한다. 그렇게 선택된 순간은 재현을 통해 영상으로 제작된다. 그들은 그 기억만을 가지고 저세상으로 떠나간다. 그렇게 망자들이 선택한 기억은 기록으로 남고, 그 기록은 또 그들의 유일한 기억이 된다. 타카시는 이곳에서 망자들의 선택과 영상 제작을 돕는 일을 한다. 사실 그는 자신의 아름다운 순간을 선택하지 못해서 이곳에 남게 된 영혼이다. 그가 담당하는 망자인 와타나베도 이 선택이 너무 어렵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고르기에는 자신의 인생이 너무 평평하게 느껴진다. 타카시는 그의 선택을 돕기 위해 비디오테이프를 건넨다. 와타나베의 인생이 기록된 영상이다. 테이프를 건네면서 타카시는 말한다. ’ 기억은 기록과 다르니 ‘ 참고만 하라고.
이 영화의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영화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여러 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이후에도 영화와 다큐작업을 병행해 왔다. 그런 그에게 인간의 기억은 마치 자기 스스로의 기록인 다큐이자 수많은 각색이 들어가는 영화로도 보였을 것이다.
난 자주 나와 비슷한 처지인 노총각형과 통화를 한다. 서로 혼자다 보니 비슷한 처지의 사람에게 의지하는 빈도가 높아진다. 한번 통화를 하면 두세 시간씩 통화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형은 자꾸 내게 더 놀라고 한다. 놀아서 후회한 적 없다고, 세월 지나 보니 기억에 남는 건 즐겁게 놀았던 기억뿐이라고. 난 별로 동의하지 않았다. 놀아야 한다는 말에는 적잖이 공감하면서도 과거의 기억에 연연하는 모습은 좀 안타까웠다. 나는 현실을 즐기는 현명한 사람이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며칠 전 놀러 온 형과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다가 늘 가던 중국집에 갔다. “형, 저번에 탕수육 세트 먹었으니까 오늘은 깐풍기 세트 시키죠?” “야! 저번에 먹은 건 깐풍기 세트잖아. “ 서로의 기억은 달랐다. 어쩌면 사실보다 기억이 중요할 지도 모른다. 우리는 기억이 달라서 서로 다투고, 기억에서 잊힐 가바 두려워하기도 한다. 만일 형이 기억하는 요리가 탕수육 세트였다면 나는 그날 깐풍기 세트를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가끔은 기억이 현실을 지배한다. 영화 속 영혼들이 찾던 것도 테이프 속의 기록이 이니라 기억이었다. 기록이 객관적 사실이라면 기억은 주관적 인식이다. 그러나 철학자 메를리 퐁티는 객관과 주관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부정했다. 감각을 통해 얻어지는 데이터 자체가 이미 정신과 얽힌 채로 형성되므로 객관적 데이터 자체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고 봤다. 어떠한 객관적 사실도 담는 사람에 따라 다른 모양과 색을 가진다. 마치 ’ 빛이 닿는 각도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보이는 달‘처럼…. 영화나 회화 같은 예술도 결국 작품과 관객의 ‘관계 맺음’으로 완성된다. 감독도 이점에 관해 ‘객관적 기록과 주관적 기억 사이의 불확실한 영역을 탐구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타카시가 떠나가고 얼마 후 복도를 지나가던 시오리는 타카시와 함께 봤던 달을 바라본다. 얇게 떠있던 초승달은 나무판이 긁히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보름달로 바뀌더니 하늘이 열리며 밤이 걷혔다. 천장에 설치된 밤하늘을 철거하고 열린 하늘에서 얼굴을 내미는 경비 아저씨는 순간 신처럼 보인다. 어라! 그들이 머무르는 그 세계는 어디일까? 영화의 세트장? 아님 신들의 공간? 문득 내가 사는 이곳은 어디인지 궁금해진다. 나도 살면서 매 순간을 나만의 필름에 담아 가며 영화를 만들어 간다. 처음에는 영화 속 영혼들의 세상이 너무 현실 같아서 이상했다. 현실 세계와 다름없는 세트장과 일반인들의 실재 인터뷰들 때문이었다. 감독은 사실을 재현하는 영화 또는 기억의 속성을 강조하는 듯하다. 그리고 현실인줄 았았던 복도 위의 달이 걷히는 장면을 통해 ‘영화 혹은 기억이 보여주는 것은 재현을 넘어서는 것, 새로운 창조물이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지금 내가 사는 세상도 영화도 수많은 관계를 통해 매번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다. 이쯤 되니 내가 사는 곳이 영화인지 현실 속인지 헷갈린다.
내 삶만큼 이 영화도 너무 헷갈려서 다시 영화를 본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여전히 아는 것은 없다. 그리고 들려오는 음악은 아름답게 내 삶에 스며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