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마지막 첫사랑 3
소개팅(blind date)
그러나 나연이가 남자친구를 사귈 무렵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곧 4학년이 되었기 때문에 주변 동기들도 모두 취업준비로 바빠지기 시작해서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낼 대상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혼자 자취 생활을 하는 나에게 외로움이란 감정이 연애를 해보라고 그렇게 나를 부추기게 되었고 이제는 주변 지인들이 해주는 소개팅을 마다하지 않고 낮은 자세로 모두 받아들였다.
그렇게 겸손한 자세로 받아들인 소개팅이었음에도 첫 번째, 두 번째 소개팅은.. 다 잘 안되었다. 우선 키와 외모가 전혀 내 스타일이 아니었고 심지어 첫 번째 소개팅 남자는 전문직임에도 불구하고 목소리 때문에 몇 번 만나다 말았다. 그랬다.. 심지어 나는 목소리까지 따져가며 만났다. 목소리가 굵은 남자가 매력 있지 가는 남자는 남자답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사람은 목소리가 너무 가늘었다. 두 번째 남자는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 대학원생이었는데 만날 때마다 아버지 얘기를 했다. 차도 아버지 차를 끌고 나왔고 식당도 아버지가 좋아하는 곳으로 예약했으며 앞으로 아버지가 본인 유학도 보내줄 거라고 했다. 말끝마다 너무 아버지, 아버지 타령이어서 전혀 매력을 느낄 수가 없었다. 심각한 파파보이 같았다. 이 사람도 몇 번의 데이트 끝에 아디오스! 를 외쳤다.
소개팅 결과를 나연이와 공유하고 나면 그녀는 항상 나보고 남자 보는 눈이 너무 까다롭다고 면박을 주곤 했다. 상대방에게 더 여지를 주지 않고 내가 너무 다 잘라버린다고도 했다.
"난 가슴 떨리는 사랑을 믿는다니까. 앞에 남자들은 둘 다 아니었어. 전혀 어떤 전율도 느낄 수 없었다고."
나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지만 사실 이렇게 소개팅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당시는 2g 폰을 쓰던 시절이라 소개팅할 상대방의 연락처를 받아 문자로만 약속시간과 장소를 주고받았기 때문에 어느 학교 출신에, 뭐 하는 사람인지, 그 이외의 정보는 알기 힘들었다. 때때로 싸이월*에서 이름을 검색해서 미리 사진을 보려고도 시도했지만 평범한 이름은 동명이인이 너무 많아 그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이름, 학교, 직업 이외에 모든 것이 깜깜한 블라인드(blind) 데이트를 나가던 시절이라 기대했던 만큼 실망도 컸다. 나의 기대치와 상대방의 외적인 조건이 너무 맞지 않으면 우린 그걸 소위 '폭탄' 만났다고도 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블라인드 데이트는 참 위험한 만남이었다.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성격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최소한의 인적 정보만 갖고 만났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때 가장 중요하게 참고한 것이 바로 주선자와 나, 그리고 주선자와 상대방의 관계였다. 가운데서 소개해 주는 주선자를 서로 믿고 나갔다. 나와 더 친밀한 관계에 있는 주선자일수록, 상대방과 더 친밀한 관계에 있는 주선자일수록 보다 믿음이 갔기 때문에 소개팅 자리에 용기를 가지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당시의 소개팅 남녀는 대부분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주선자에 대한 예의로 서로 매너를 갖춰 상대방을 대하였다. 나 역시도 그 룰을 따랐는데 남자 쪽이 밥을 사면 나는 최소한 커피나 디저트는 꼭 사려고 했다. 앞으로 더 만나지 않을지라도 그 만남 자체에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자 했다.
세 번째 소개팅의 주선자는 밴드 동아리 활동을 같이 하던 친한 남자 선배 동율이었다. 동율 선배는 이미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막 시작했는데 본인 직장 사수의 동생이 정말 괜찮다며 나에게 만나보라며 전화가 왔다. 사수의 동생이라면... 소개팅 남은 위로 형과 누나가 있는 3남매 중 막내라고 했다.
동율 선배는 밴드 동아리 대표를 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으며 성격도 유한 따스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가정 형편이 그리 좋지 못했음에도 뛰어난 성적으로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을 정도로 자기 관리와 책임감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오래 사귄 여자 친구가 있어서 나와는 좋은 동아리 선후배로 지냈지만 서로에게 기본적인 감정은 '좋아할 호'였다. 확실한 믿음이 가는 사람이 주선자로 나서니 왠지 느낌이 좋다. 소개팅할 상대방의 핸드폰 번호를 받고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며칠 뒤,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안녕하세요. 민지훈이라고 합니다. 평일도 괜찮으시면 수요일쯤 만날까요? 장소는 편하신 곳으로 정하시면 제가 가겠습니다.'
평일에? 마음에 안 들면 일찍 헤어지려고 하는 계산인가? 어쨌든 대학교 졸업반이었던 나는 수요일 오후에 수업도 없었고 딱히 별 일이 없긴 했다.
'알겠습니다. 장소는 신촌 어떠세요?'
나는 학교와 집이 가까운 곳으로 데이트 장소를 골랐다. 근처에 백화점도 있고 하니 식당, 카페 고민 없을 것 같고 집도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이니 내 입장에서는 일석이조였다.
'사무실에서 멀지 않아 좋네요. 퇴근 후에 가야 돼서 6시 반쯤 도착할 듯합니다.'
띠링하고 민지훈이란 사람한테서 다시 답장이 왔다.
우리는 2004년 3월의 어느 수요일, 신촌역 1번과 2번 출구 사이에서 만나기로 하며 그렇게 첫 약속을 잡았다.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에 대한 기대로 그다음 주 화요일까지 기분 좋은 날들을 보냈다. 잠시 취업에 대한 고민도 내려놓을 만큼... 그러다 문득 민지훈과의 소개팅 전날, 동율 선배한테 오랜만에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어, 은수야. 소개팅 잘했니?"
"아니요. 내일 만나기로 했어요."
"아, 그렇구나. 그 사람 엄청 잘 생겼대. 너 너무 말 많이 하지 말고 만나라. 너는 다 좋은데 입만 열었다 하면 너무 아줌마 같아."
아줌마 같다는 말에 원래 물어보려는 말을 까먹고 발끈했다.
"아니, 선배님! 제가 무슨 아줌마 같다고 그러세욧!!"
"푸하하하. 네가 친해지면 좀 그렇잖아. 처음에는 요조숙녀 같더니만... 근데 왜 전화한 거야?"
이제야 전화를 건 원래 목적이 생각났다.
"아.. 소개팅 전에 좀 걱정돼서요. 상대방에 대해 너무 아는 게 없어서... 근데 소개팅 남이 잘 생겼다고 하시니 갑자기 막 기대가 되네요?"
"집안도 좋고 키도 크고 잘 생겼다고 하더라. 군대 안 가고 대학 졸업하고 바로 직장 잡았나 봐. 나이는 어려. 너보다 한 살 많을 걸? 이번엔 좀 잘해봐라."
진심 어린 걱정인지, 살짝 놀리는 건지 동율 선배의 진심을 알 수는 없었지만 잘 생긴 남자를 연결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마음이 샘솟았다.
"감사합니다. 잘 만나고 또 보고 드릴게요."
전화를 끊고는 내일 최상의 피부 상태로 나가기 위해서 마스크 팩까지 붙이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성실한 학생이었으니까... 모든 소개팅 자리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