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님. 깊어가는 계절 가을에 문득 작가님께 편지를 쓰고 싶은 마음을 갖게 만든 건 작가님의 <한 말씀만 하소서> 란 글을 읽어서일 겁니다.
아드님을 잃고 절규하시며 쓰신 글을 읽는 내내 엄마의 비통함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한동안 책을 놓고도 가슴 저리고 먹먹함이 가시지 않더군요.
13년 전 작가님이 작고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문학의 거장이 가셨구나 마음이 공허하더군요. 한국 문학의 어머니셨던 작가님은 떠나셨어도 남기신 15편의 장편소설과 수많은 작품들과 함께 여전히 살아서 숨 쉬고 계십니다.
이제 고통없는 천국에서 그토록 만나고 싶던 아드님과 재회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아마도 그동안 밀린 얘기 나누시리라 시간 가는 줄 모르시고 함박웃음을 짓고 계실 그 온화한 미소를 떠올려 봅니다.
의대를 다니다가 갑작스런 사고로 25살의 젊은 아드님을 잃고 오랜 시간 마음을 찢는 고통스런 어머니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요. 하느님을 원망하시면서 그 이유를 제발 한 말씀만 해달라고 울부짖으신 비명을 같은 엄마로서 통감했습니다.
아드님의 부재가 작가님을 얼마나 상실하게 만드셨을까요. 자식이 열만 나고 몸살로 끙끙 앓기만 해도 제 품에서 놓지 못하고 대신 아프기를 바라는 어미의 마음을 알기에 그 고통을 감히 헤아려 봅니다.
88올림픽과 맞물려 온 세상은 축제 분위기인데 작가님만 어두운 잿빛 세상에서 홀로 상실감과 싸우셨다니 가슴이 아려옵니다. 독재자라면 축제를 멈추게 하고 싶었단 말씀까지 공감되더군요. 하필 시기가 맞물려서 환호와 열광하는 분위기여서 더 허탈함을 느끼셨을 것 같아요.
네 분의 따님을 두신 작가님께서 딸들이었어도 같았을까 괴로워하고 죄책감에 시달리셨다는 걸 알고는 아픈 손가락이 있듯이 작가님껜 하나밖에 없는 한번도 실망시킨 적 없는 자랑스런 아들이었기에 더 특별했던 것 뿐입니다. 그걸 아시지만 그런 몹쓸 생각이 작가님을 더 괴롭히셨구요...
어찌 오만 가지 생각이 안 들었을까요. 신이 원망스럽고, 아들이 없는 세상이 똑같이 돌아가는 데 화가 나고, 꾸역꾸역 식사를 밀어넣고 잠을 청해야 하는 일상에 회의감이 밀려오고 누구나 그랬을 겁니다. 잠도 못 주무셔서 수면제로 잠을 청하시고, 식사도 못하시고 술로 달래시던 삶의 의욕을 잃은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듯합니다.
몸도 마음도 무너져내리는 작가님을 지켜보던 따님들이 어머님 걱정을 많이 하셨을 겁니다. 부산에 계신 따님, 미국에 계신 따님 모두 어머니를 모셔와서 헌신과 사랑을 다하셨어도 채워지지 않는 상실감을 결국 홀로서기로 이겨내셨네요.
변호사 아들을 잃은 한 목사님께서 장례를 치르면서 열 가지 감사 제목을 말씀하시는 영상을 보았어요. 특별한 기억을 주고 여전히 가슴속에서 살아있게 함을 감사하고, 손자를 남겨주어 남은 사랑을 줄 수 있어 감사하고, 아들을 통해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었음에 감사하는 것을 보면서 저럴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35살 따님을 병으로 보내고 2년 만에 겨우 세상 밖으로 나오신 분도 계십니다. 아직 밖에서 웃으며 사람을 대하고 식사할 자신이 없다고 하시더군요. 작가님이 식사를 못하시고 먹은 것을 다 토해내고, 수면제를 드셔야 잠을 청하신 것처럼 고독의 시간을 자청하셨어요. 어떤 말로도 위안이 안 되기에 잠잠히 기다렸답니다. 슬픔이 끝나진 않겠지만 마음을 열어주실 때까지요. 2년 만에 가까이에서 뵐 수 있어 얼마나 기쁘던지요.
작가님. 수녀원 생활을 통해 동굴 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해주셨군요. 그곳에서 교만과 오만이 있었음을 깨닫고, 마음을 내려놓으시고, 생각의 전환을 하셨네요. 마음의 평온을 찾으시면서 글로 그 고통과 슬픔을 승화시키셨을 때 아마도 신이 내면의 깊숙한 고통까지 끌어내는 글로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리는 글을 쓰는 도구로 사용하신 건 아닐런지 감히 좁은 소견으로 생각해 봅니다.
따님이신 호원숙 작가님도 대를 이은 작가가 되셔서 어머님의 발자취를 그려내고, 아직 발표되지 않은 작품들을 정리하신다니 자랑스러우실 겁니다.
가치 있고 뜻 깊은 인생을 사신 작가님. 독자들의 마음에 울림을 주시고 수많은 작품으로 감동을 주신 작가님. 소탈하면서도 수줍은 소녀 같은 온화한 미소가 돋보이던 작가님. 이제 아드님과 남편 분과 손잡고 천국 소풍 마음껏 누리시고 작가님의 네 따님과 손주들의 삶을 지켜보시리라 믿습니다.
세상을 다시 사랑하는 능력을 주셔서 감사하되, 너무 집착하게는 말라신 작가님의 마지막 글이 가장 마음에 와닿네요. 집착하시지 않았기에 편안히 떠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에게 잊혀지기 전까지는 죽음은 결코 진짜 죽음이 아니라는 조지 엘리엇의 말처럼 작가님은 떠나셨지만 사랑하는 어머님. 자랑스러운 할머니임을 마음속에서 늘 잊지 않을 가족들과 여전히 작품속에서 만나고 있을 독자들을 기억해주세요.
삶과 죽음은 우리 영역이 아니기에 주어진 생에서 어떤 시련과 절망이 찾아와도 낙심치 않겠습니다. 언제 사라질런지 아무도 모르는 안개와 같은 인생임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살아계셨다면 깊어가는 가을 선홍빛으로 물들어가는 단풍을 바라보며 가을 인사를 건넸을 텐데 가슴속에서만 만나뵙습니다. 천국에서 편히 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