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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단풍 곱게 물들 때

by oj


재작년 가을 형님이 타계하셨다. 환갑도 안 되신 나이에 췌장암 투병 4년 만에 하늘의 별이 되셨다. 단풍이 곱게 물든 11월 초쯤 깊어진 가을 어느 날이다. 삶에 대한 애착이 너무도 강한 씩씩한 분이셨다.


필리핀에서 20년 넘게 아주버님 사업으로 제2의 고향처럼 사셨다. 암이 발견되고 수술 후 항암으로 이어지면서 한국생활이 시작 되었다. 필리핀을 참 좋아하셨는데 코로나로 상황이 악화되면서 그렇게 그리워한 필리핀 집에도 못 가시고 떠나셨다. 100세 시대라는데 너무 일찍 가버리신 형님 생각에 장례를 마치고 온 날 밤에 피곤하면서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함께 한 기억들이 떠올라서 뒤척거리며 허탈한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를 않았다.


초창기 사업 실패로 고생만 하시다가 아주버님 뒷바라지 하며 이제야 안정을 찾고 살만해졌는데 제대로 누려보지도 못하시고 예후가 안 좋은 췌장암 선고를 받았다. 급성으로 황달 증상이 와서 췌장암을 발견한 뒤 12시간 대수술 끝에 수술과 항암도 잘 견디시고 회복해서 2년 동안은 정말 감사하며 사셨다. 2년 만에 다시 재발 되셨을 때도 절망만 하지 않고 다시 시작된 항암을 잘 견디며 삶의 애착을 강하게 보이셨다. 누구나 건강을 잃는 순간 삶의 질이 떨어지는 것을 경험한다. 본인 스스로도 가족들도 무기력하게 만든다. 본인은 물론 투병하는 것을 지켜보는 가족들도 대신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어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재작년 추석 때부터 몸이 안 좋아지시더니 갑작스런 3개월 선고에 가족 모두가 무너졌다. 큰 딸은 결혼했지만 아직 남은 둘째 딸과 막내아들이 눈에 밟혀 제대로 눈이나 감으셨을까. 건강도 잘 관리하고 강한 분이라 일어나실 줄 알았다. 시한부 선고받으신 뒤에 병원이 싫다며 집에서 투병하셨다.


방문 간호사가 한 번씩 다녀가며 진통제와 페치로 견디셨다. 고통과 실의에 빠진 형님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가슴이 미어졌다. 그 마음 누가 헤아릴까. 파리하게 야위어 앙상하게 마른 몸을 꼭 안아드렸다. 가슴이 먹먹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막내아들이 연신 엄마의 손발을 주무르고 힘들어 하면 앉을 수 있게 뒤에서 받쳐주며 앉았다 다시 눕기를 반복했다. 지극 정성 간호를 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남은 힘으로 겨우 버티고 계셨다.


답답한 병원에 갇혀있기 싫다며 호스피스 병동 대신 집에서 투병하셔서 자주 뵈러 갔다. 아주버님께서 형님이 수술하시면서 사업장 근처 공기 좋은 곳에 단독주택을 사놓으셔서 형님과 텃밭도 가꾸면서 오손도손 둘이 살던 곳이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창문 밖으로 보이는 커다란 산이 울긋불긋 빨갛게 단풍이 물들고 길엔 은행나무가 노랗게 변하고 있었다.


계절의 변화를 고스란히 느끼는 아름다운 정취를 보며 거실에 앉아 깊어지는 가을을 보시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병문안을 갈 때마다 아이들 걱정을 가장 많이 하셨다. 결혼할 때 대신 신경 써달라고 말이다. 그 말에 무슨 소리냐고 형님이 직접 하시라고 약한 마음 갖지 말라며 손을 꼭 잡아 드렸다. 그 곳에서 몇 번의 응급 상황을 겪다가 한 달 만에 가족들 보는 앞에서 조용히 임종하셨다.


필리핀에 계실 때 우리 애들을 2년 동안이나 돌봐주신 고마운 형님에 동서지간으로 오랜 시간 정을 나눈 가족이었다. 자기주장이 강하셨지만 화끈한 성격에 큰며느리답게 통 크게 가족들을 챙긴 인정 많은 형님이셨다. 바로 앞에 있던 사람을 이젠 볼 수 없다는 견디기 힘든 사실은 가까운 이들을 상심과 상실감에 빠지게 했다.


예견된 이별도 이렇게 힘든데 준비되지 못한 이별은 얼마나 받아드리기 힘들까. 연로한 아버지나 아버님을 떠나보낼 때와는 또 다른 안타까움이었다.

떠나고 나니 그 빈자리가 생각보다 컸다. 무엇보다 며느리를 먼저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아들을 측은하게 바라보시는 연로한 어머님의 공허한 눈빛이 그 슬픔을 말해주었다. 식사도 겨우 하시고 몸 상하실까봐 일찍 가서 쉬시게 했지만 끝까지 3일 내내 며느리 곁을 지키신 어머님이다. 입관할 때는 그야말로 눈물 바다였다. 고생하던 아내를 떠나보내는 아주버님도 자식들이라면 끔찍했던 엄마를 떠나보내는 조카들도 젊은 며느리를 먼저 보내는 슬픔을 감당하시는 어머님도 모두 부둥켜안고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조카들을 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었다.


고통스럽고 가슴이 먹먹했지만 평온히 누워계신 형님을 보며 조용히 마음속으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아픔 없는 곳에서 편히 쉬세요. 가족들 걱정마시고 이제 편안히 눈감으세요. 그동안 애 많이 쓰셨어요. 형님.”

아버님과 같은 납골당에 안치를 하고 나오는데 발길이 안 떨어졌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안 되지만 가족들에게 다시 한 번 위로를 전하고 형님을 가슴에 묻고 돌아왔다.


삶은 참 고단하다. 태어나는 것도 떠나는 것도 내 맘대로 할 수 없다. 인생의 갈림길 앞에 선 그 두려움은 아무도 알지 못하고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할 몫이다. 지켜보는 이도 가슴 아프고 애잔하기만 하다.


요즘 하나 건너 하나 암환자들이란 말이 있을 정도이다. 100세 시대가 되다보니 점점 환자가 늘고 건강 검진에서 조기발견 되어 통계상으로 증가 추세이다. 실제로 나이가 들다보니 하나둘씩 들리는 주변의 암 소식에 자주 가슴을 쓸어내린다. 이제 암은 큰 질병이 아닌 일반화된 질병이고 그만큼 완치도 많이 된다지만 우리 생존을 위협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형님을 떠나보내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자신을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아야겠다는 것이다. 아등바등 힘겹게도 살지 말고 억척스럽게 몸을 혹사하지도 말고 지나치게 잘 하려고 애쓰지도 말고 안간힘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주어진 내 삶에 만족하며 하루하루 평범하게 주어진 일상을 묵묵히 견디면서 말이다. 평범함이 지루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평범함이 깨지는 순간 우리 삶은 고단해지고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아오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형님께 조용히 마지막 인사를 다시 건네었다.

‘단풍 곱게 물들고 있을 때쯤 하늘나라로 가신 우리 형님. 이젠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지만 고통 없는 곳에서 편히 쉬시고 언제나 잊지 않고 기억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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