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은 결혼기념일이 있는 달이다.
벌써 30년도 넘은 일이지만 결혼을 앞두고 왠지 마음이 센티해졌다. 가을이라 그랬는지도 모른다.
대학 졸업 전 2년. 사회생활 2년. 4년을 사귀고 결혼 날짜를 잡으면서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드디어 인생을 함께 할 동반자를 만났다는 벅찬 감격과 설렘 동시에 괜히 마음 한 켠이 착잡했다.
학창 시절 내내 나를 좋아하며 쫒아다니던 남학생이 있었다. 나도 그 친구를 좋아하면서도 마음을 표현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시절 너무 어렸고, 그런 감정이 낯설고, 남자친구를 사귀기엔 적극적이지도 못한 소심했던 나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였을 거다. 같은 반이었던 그 친구는 반장에 똑똑하고 축구도 잘 하며 씩씩한 데다 모범생이었다. 키도 크고 반듯해 보이던 아이. 첫사랑이 시작됐다. 두근거림과 설렘이란 감정을 처음 갖게 만든...
중학교에 가선 쪽지도 받고 집으로 따라오기도 했지만 냉정히 거절했다. 내 마음을 들키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워서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따로 만난다거나 사귄다는 건 생각조차 안 했다.
친구들에게도 내 첫사랑을 털어놓지도 않은 혼자만의 감정이었다. 결혼할 때쯤 왜 그 친구 생각이 그렇게 났을까. 갑자기 그 아련한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다. 오래 전 졸업 앨범 뒤에 있던 그 친구의 집주소로 편지쓰는 용기를 냈다. 복잡한 감정을 정리하고 싶었던 건지 한 번쯤은 나도 같은 마음이었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던 건지 그 시점에 그 친구가 왜 갑자기 궁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가는 대로 두었다.
이제 성인이 되고 결혼을 앞두고 있으니 순수했던 나의 솔직한 감정과 이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10년도 더 넘은 초등학교 졸업 앨범 주소여서 그 주소에 아직 살고 있으리란 확신도 없었다. 편지가 갈 거라곤 생각치 못했고, 더 정확히는 편지가 주소 불명으로 반송되길 바랐다.
어느 날 회사로 전화가 왔다. 그 친구였다. 편지를 받고 내가 써놓은 전화번호로 전화를 한 거였다. 편지가 갈 줄 몰랐는데 아직 그 주소에 산다니 놀라웠다. 흠찟 놀라긴 했어도 이제는 어렸던 내가 아니니 쿨하게 전화를 받고 회사 근처인 종로에서 한번 만나기로 했다.
괜한 짓을 했나 싶기도 하고, 오랫동안 나를 좋다고 쫒아다닌 친구에게 이제 지나간 옛 감정이니 괜찮을 것도 같고 마음이 복잡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사회생활 하며 달라진 내 외모에도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결혼 전 센티해진 내 마음의 처음이자 마지막 가벼운 일탈이었다.
만나고 보니 별 감정이 없이 편하게 얘기할 수 있었다. 옛 동창 친구를 만난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내 편지 보고 너무 놀라고 기뻤다고 했다. 한 번쯤은 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싶었다고 편하게 얘기했다. 사회생활의 근황을 나누고 옛 친구와의 대화처럼 편하게 얘기를 나누었다. 그 뒤로 둘이 만나긴 어색해서 친한 친구와 같이 몇 번 더 만났지만 예전의 감정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결혼하면서 묵은 감정의 회자정리를 잘 했다 싶었다.
한참 후에 동창 친구를 통해 들은 얘기였다. 내 편지를 친구들에게 신나게 자랑하며 여기저기에 그 일을 떠벌리고 다녔다는 말에 기함했다. 그렇게 가벼운 애였나 싶어서 실망스럽고 괜히 만났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역시 첫사랑은 마음에 남길 때 아름다운 것을 알았다. 차라리 안 만났다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었을 텐데...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돌이킬 수 없고 그리움으로 남아있어 아름답다는 사실을 잠시 잊은 그때의 행동이 후회되지만 덕분에 첫사랑 감정과는 완전히 이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