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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유공자. 외삼촌

by oj


엄마는 8남매셨다. 이모와 큰 외삼촌. 엄마 뒤로 모두 다섯 남동생이 있다. 가난한 두 분이 농사를 지으시고 소 한 마리 키우시며 8남매를 키우시긴 벅차셨을 것이다.


이모도 일찍 결혼하시고 엄마도 23살 어린 나이에 결혼하셨고 큰 외삼촌과 외숙모는 동네 친구 사이로 다들 일찍 결혼하신 이유도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엄마는 할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은 큰 외삼촌과 바로 아래 남동생인 외삼촌을 가장 좋아하셨다. 나머지 동생들은 너무 나이가 어려 엄마가 서울에 올라와서 사회생활을 하시면서 학비를 대주셨다. 동생들 뒷바라지 하면서 부모님들의 수고를 덜어 드리려고 결혼도 늦게 하려고 했지만 아버지를 만나면서 집안에서 서둘러 결혼을 시키셨다고 했다.


삼촌은 젊을 때 월남전에 참여하셨다가 두 다리를 모두 잃은 국가 유공자셨다. 가난했던 부모님을 도우려고 월남전 참전을 하시면서 경제적으로 보탬이 되려고 했던 삼촌이 안타깝게도 폭격에 다리를 다치시고 계속된 괴사로 두 다리를 절단해야만 했다. 가족들의 상심이 얼마나 컸을까. 엄마도 그 때 일을 생생히 기억하셨다. 가족들과 병원에 가셨는데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했다. 젊은 나이에 수술을 하시고 무릎 아래 쪽만 남은 큰 장애를 갖게 되었다.


거기다가 고엽제 후유증으로 진통제를 달고 사셨다. 수도 병원에서 꾸준히 약을 처방받아 드시면서 밤마다 통증으로 끙끙 않으셨던 삼촌이셨다. 삼촌은 청주에 사실 때 외숙모를 만나서 결혼하시면서 딸 넷을 낳으셨다. 우린 외숙모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외삼촌이 청주에 사실 때는 건축일을 담당 하셨고 적극적인 외숙모 덕분에 아이들 교육을 위해 서울로 오셔서 모두 대학에 보내시고 강인하게 삶을 헤쳐오신 두 분이셨다.


외삼촌의 네 딸은 모두 똑똑하게 자랐고 국가 유공자 혜택을 받아 대기업에 취직해 결혼도 잘 시켜 항상 감사하게 생각했다. 외삼촌은 운전을 잘 하셨다. 손으로 브레이크를 잡을 수 있는 자동차를 타셨고 의족 대신 휠체어가 편하시다면서 휠체어 생활을 오래 하셨다. 어릴 때부터 봐온 삼촌 모습이라 우린 익숙했는데 우리 아이들은 그런 삼촌 할아버지를 처음엔 낯설어 해서 이유를 설명하고 잘 이해시켰다.


중증 유공자이신 외삼촌은 연금 혜택을 많이 받으셔서 생활하는데는 어려움이 없으셨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엄마를 가장 많이 의지하던 외삼촌은 우리집에 특히 자주 놀러오셨다. 큰 이모는 연세가 많으셨고 집도 멀어서 작은 누이인 엄마를 좋아하셨다. 아버지가 차에서 내리신 외삼촌을 업고 오시고 늘 반바지를 입고 계셔서 집에는 항상 방석이 놓여져 있었다. 엄마가 담근 김치를 항상 맛있게 드시는 삼촌을 위해 엄마는 봄엔 얼가리 김치 한 통. 겨울이면 김장 김치 한 통을 오실 때마다 보내셨다.


외숙모 김치가 입에 안 맞아 입맛이 없다고 하시다가도 누이가 해준 음식은 다 맛있다며 그렇게 좋아하던 삼촌이셨다.

외숙모가 유방암을 앓고 먼저 돌아가셨다. 수술도 안 받으시고 오랫동안 투병하시다가 돌아가신 뒤로 외삼촌은 기력을 많이 잃으시고 삶의 의지도 많이 꺾이신 것 같았다. 엄마는 몸도 불편한 동생이 홀로 남겨진 것을 무척이나 안쓰러워 하셨다. 하지만 가까이 사는 네 딸들 덕분에 잘 이겨내고 계셨다.


매일 몇 시간씩 오시는 요양 보호사와 딸들이 보내준 도우미 아줌마의 도움을 받으시면서 헛헛하신지 더 자주 엄마집에 오셨다. 우리집에 오시면 며칠 쉬다가 가시고 아버지도 그런 삼촌을 잘 챙겨주셨다.


그러던 아버지가 췌장암 진단을 받고 먼저 돌아가셨을 때 삼촌은 엄마를 옆에서 많이 위로해드리고 두 분은 서로를 더 의지하셨다. 아버지를 많이도 좋아한 삼촌이셔서 매형이 그립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혼자 되신 엄마를 위해 더 자주 오셨고 바람 쐬러 가자며 엄마를 모시고 가서 장어도 사드리고 같이 시간을 보내셔서 참 감사했다.


어느 날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코로나 기간이어서 엄마도 병문안 한 번을 가지 못했다. 폐렴 증상이 있으셨다니 금방 퇴원하실 줄 알았는데 입원하셨다가 퇴원도 못하시고 임종 소식을 들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이대 목동 병원에서 장례가 치러져 코로나 때라 증명서를 제출하고 마스크를 쓰고 간단히 조문만 할 수 있었다.


영정 사진에서 차분한 인상의 삼촌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엄마는 동생 이름을 부르며 연신 울고 계셨다. 외숙모에 이어 외삼촌까지 떠나보내야 하는 사촌 동생들에게 위로를 전했다. 그나마 자매가 많아 서로 의지할 수 있어 안도했다. 삼촌은 현충원에 안장 되셨다.


장애로 살아간다는 건 우리 사회에서 참 힘든 일이다. 유튜브 '위라클' 을 운영하는 박위란 사람을 응원하고 있는 이유도 같다. 취업에 성공해 친구들과 축하하던 중 술을 마시고 추락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된 젊은 청년이다.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재활에 성공하면서 자기처럼 장애를 입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하면서 선한 영향력을 주었다. 최근엔 위라클 택시를 운영하며 유명 연예인이나 지인들과 인터뷰한 유튜브 채널로 큰 인기를 끌었다. 아이돌 출신 여가수와 신앙으로 만나서 예쁜 연애도 하게 되어 10월에 결혼 소식도 전해졌다. '라디오 스타' 란 예능 프로에도 나와 많은 사람들의 격려를 받으며 장애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삼촌의 어려움을 익히 알고 있어 그를 더 응원한 것 같았다. 많은 이들에게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데 일조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그를 비롯한 장애인이 평범한 일상을 어려움없이 살 수 있도록 응원한다.


그동안 다리가 없는 불편함도 장애인으로 살았던 어려움도 이제 천국에서는 싹 사라지고 두 다리로 건강하게 걷고 있을 삼촌을 그리며 다시 한번 삼촌이 걸어갔을 고된 인생을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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