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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법칙전달자 May 23. 2021

안타깝다고 하는 것

안타깝다고 하는 것 


등려군의 음악회에서 일부대중들의 반응을 보고 한 평론가가 그 음악이 지닌 절대적인 가치의 부분밖에 혹은 거의 느끼지 못하여 그것을 통해 느낄 수 있는 행복을 만끽하지 못 하는 대중들이 안타깝다고 한 것이 생각납니다. 저는 한 10년 전에 한 친구로부터 등려군과 그 노래에 대한 소개를 듣게 되었는데 낮에는 등소평이 밤에는 등려군이 중국을 지배한다고 할 정도로 그녀의 노래의 영향력을 설명하면서 등려군의 노래 세 곡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때 한 곡은 전에 들은 노래였던 것 같았고 두곡은 생소했는데 그 때는 그 노래의 가치를 별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노래에 본격적으로 매료되어 관련 카페를 만들기까지 한 것은 그로부터 5년 이상 지난 때였습니다. 


얼마 전에 한 음악전문가로부터 눈과 혀는 사람들 사이에 공동범위가 크다고 합니다. 즉 어떤 사람에게 아름다운 경치는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느껴질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죠. 음식의 맛도 그러합니다. 공감대의 일치의 폭이 크다고 합니다. 그러나 음악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황홀감을 느끼게 하는 음악도 다른 사람에게는 소음으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이죠. 그 말에 저는 제가 평상시에 가지고 있던 한 의문이 풀렸습니다. 하루에 수 십 번씩 매료되어서 듣던 음악들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면 “참 음악 취향도 별나네.” 혹은 “에이! 뭐 그런 정도의 음악을 가지고 뭘......” 하는 식의 반응이었죠.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그런 소개를 안 하게 되었죠. 상대는 그 음악을 통해서 내가 느끼는 그런 행복을 맛보지 못하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 음악가로부터 그런 말을 듣고 관련 생각들을 정리하게 되었죠. 


그러면 그것은 취향의 문제이고 미적 감각은 저마다 다른 것이어서 그러할까요? 음악평론가의 글에서 정리하게 된 생각은 음악이나 미술이나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데 사람마다 발달된 심미안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일부분 혹은 약한 정도로만 느끼거나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과 좋은 가치가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데 나쁜 절대적인 가치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한 유명하다는 군가의 가사에는 전장에서는 적의 생명이건 너의 생명이건 아까워하지 말라는 가사가 있죠. 그 음악의 의도는 그런 감정을 고취시키려는 목적 즉 가치가 있는 것이죠. 독성이데올로기 같은 것도 그 가치를 재대로 흡수된 사람들에게 그 효과가 작용하는 것이겠죠. 음란물도 나름의 가치가 있겠지만 그것으로부터 해로움을 받지 않으려면 거부해야하는 것이죠.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사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짐승들은 물론 음악을 인간처럼 즐길 수 없습니다. 그런 기능이 아예 내장되어 있지 않죠. 그런데 그런 면에서 마치 짐승들과 같은 사람들이 있는데 성서에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는 말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진리는 간명하고 예수는 가장 훌륭한 방법으로 그것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소식의 가치를 인식하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극소수였습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음악에 비유될 수 있는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감상할 수 있는 귀가 없었습니다. 귀는 있어도 듣지 못한다는 이사야의 예언과 일치하게 그러하였습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소음 즉 고통을 주는 소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소리의 근원을 제거하려했을 정도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독성이데올로기와 같은 해로운 가치가 있는 음악 즉 사상에는 익숙하여 그걸 늘 감상하면서 살고 있지만 막상 본질적인 힐링 효과가 있는 노래는 소음으로 여기는 귀를 가지고 있죠.  


이는 어떤 음악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귀를 가지고 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렇다고 그가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귀를 갖지 못한다면 베드로가 말한, ‘죽기 위해 태어난 이성 없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 점이 안타깝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들을 귀가 없어 고집스럽게 그런 입장을 고수하는 것입니까? 진리로 전해져 오는 소식을 들어보지도 않고 거부해버리는 그런 태도를 말이죠. 

사도바울이 다음과 같은 예언을 인용하면서 안타까워 한 바와 같습니다.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보기는 보아도 결코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이 백성은 마음이 무디어졌고, 귀로 들어도 반응이 없으며,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이해하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반면에 예수의 비유에 나오는 것처럼 진주를 진주로 인식하는 분별력을 가진 사람은 전 재산을 팔아 그것을 얻으려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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