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때마다 두려움에 떠는 직장인
나는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두렵다.
이 말을 해도 되는 상황인지, 상대가 내 생각이 궁금한지, 내가 하려는 말이 허무맹랑하거나 누군가의 감정을 건들지는 않는지.. 나를 망설이게 하는 이유들이 너무나 많다.
그것들은 한꺼번에 내 앞에서 컨펌을 받으려고 줄을 서있기 때문에, 한 가지씩 체크하며 아, 말을 해볼까 하는 순간이 되면 어느새 ‘이 말을 해도 되는 상황’이 지나가버린다.
타이밍을 놓치거나 화제가, 주제가 바뀌어버리는 것이다. 간혹 뒤늦은 주제이더라도 다시 꺼내며 본인 생각은 이러했다고 당당히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그렇게 뻔뻔하고 당당한 사람은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이 떠올라도 바로 뱉지 못하게 되는 이런 당혹스러운 모든 순간들은 나를 구성한다. 그런 순간들이 모여서 지금의, 조심스럽고 말 수가 적고 신중한 인상의 내가 되었다. 내 안에서 이야기들이 노래를 하지만, 알을 뚫지 못하고 죽는 작은 새처럼 그 이야기들은 내 안에서 맴돌다 사라진다.
내가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어릴 땐 선생님께 칭찬받는 학생이고 싶어서, 늘 정답을 외치기 위해 손을 번쩍번쩍 들었었고, 또래들이 범생이라고 비웃어도 기죽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춘기가 빨리 찾아온 어떤 소녀들의 눈에 어긋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어른들 말씀처럼 애들 장난이었다. 내 또래지만 나보다 훨씬 키가 큰 여자 아이들 앞에 불려 가서, 나는 잔뜩 주눅이 들었다. 나를 조롱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평소 수업 시간에 손을 번쩍 들고 발표할 때처럼 큰 목소리로 사과해 보라는 말들에, 벼락을 맞는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자랑스럽게 취해온 행동들이 이렇게 비웃음과 놀림과 조롱의 대상이 된다는 것, 그 결과 나는 이렇게 옆에서 편들어주는 친구 한 명 없이 혼자라는 결론이 아프게 다가왔다. 나는 해마다 단짝 친구 한 명도 잘 유지하지 못해 친구 관계에 고통을 겪던 초등학생이었는데, 6학년이 다 되어서 또래로부터 수모를 겪고 스스로 그렇게 결론을 내버린 것이었다.
그날 나는 울면서 집에 뛰어들어갔는데, 해마다 내가 학교 생활 때문에 힘들어하는 모습에 지쳤던 엄마는 그날 내게 바깥일은 밖에서 해결하고 들어오라며 화를 내버렸다. 이중으로 큰 상처를 받았지만 더 이상 이야기할 곳마저 없어, 막막한 좌절을 경험했다.
그 후부터는 내 나름의 해결 방안으로, 또래들이 주변에 있을 때, 너무 잘난 척하려고 혹은 모범적으로 튀려고 하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선생님에게 이쁨 받는 학생이 되는 것이 나에겐 일종의 법이었고, 나를 또래들로부터 보호하는 방어기제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난 친구하기 싫은 재수 없는 애일 뿐이었고 항상 외로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고집도 세고 어릴 때도 취향이 확고해서, 보라색과 분홍색으로 온몸을 휘감고 다닌 것이 또래들에게 거부 반응을 일으켰을 것 같다. 그때는 좀 더 성숙하고 세련된 패션 센스를 지닌 아이들이 친구가 많았던 것 같으니 말이다. 난 그때 안경테도 보라색을 고집했는데, 생각할수록 웃음이 난다. 어떤 방면에서는 참 주변 눈치 안 보고 살았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주변에서 항상 밀쳐지던 일화들이 쌓여 나를 지금까지 쫓아다니며, 회사에서 말을 하는 것도 버거워하는 사회인을 만들었나?
인정하고 싶지 않다. 지금은 나를 아껴주는 친구들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는 난 잘 자란 성인이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그 친구들은 고등학교와 대학, 직장을 거치며 각종 풍파를 견디고도 내 곁에 남아준 아주 소수이다. 그 외 대부분의 사람들을 나는 내가 밀어내거나, 소원해지면 그대로 흘려보내거나, 다가오려는 이들은 나와 결이 안 맞으면 애써 외면하고 살아왔다.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본래 좋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다른 이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며 묻거나 들으려고 하는 천성이 아니기도 하다. 이런 타고난 기질이, 인정하기 싫어도 지금의 나를 만든 거다.
그럼 혼자 외딴섬에서 살아야 하나? 나는 아주 예민해서 낯선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을 힘들어하는 것이지, 평생이고 혼자서만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소중한 이들과 나누는 깊은 유대를 가치 있게 여기고, 내 인생을 채워주는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로 여긴다.
다만 나는, 사람들과 교류할 때 왁자지껄 재미난 이야기를 쏟아내고 받아들이며 에너지를 발산하는 식보다는, 잔잔하게 눈을 마주치고 표정을 읽으며 소소하고 조용한 대화를 이따금씩 나누며 내 에너지를 응축하는 걸 즐긴다. 살다 보니 이런 식의 확실한 취향, 혹은 편식은 내가 꺼리는 불편함과 쉽게 멀어질 수 있도록 보호해 주었고, 동시에 교류하는 사람이 한정적인, ‘좁고 깊은 인간관계’를 선호하는 사람으로 분류되게끔 만들었다. 모든 것이 나의 선택이었고, 다행인 건 그렇게 내 취향에 맞게 선택하고 맺어온 인간관계는 쉽게 옅어지거나, 나를 괴롭게 하는 일이 없었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하기 싫은 것은 죽어도 안 하려는 내 고집 때문에, 인간관계도 그렇게 내 주변은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사람들만이 오고, 간다.
이런 상황에 나이 들수록 점점 더 익숙해지다 보니, 나는 말을 하는 행위에 있어서도 점차 편식을 하게 되었다. 말이라는 건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와 교류할 때 필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잘 모르는 상대방 앞에서는 쉽게 내 의중을 드러내지 않으려 두터운 방어기제를 쌓고 대화를 하고, 먼저 말문을 여는 일은 극히 드물며, 여러 청중 앞에서 이야기할 때는 정제된 언어로 의도한 바만 전달하기 위해서 완벽히 여러 번 검수한 대본을 필요로 한다.
이런 나는 회사에서 매일매일 연극을 하는 기분이다. 모든 중요한 보고, 발표 때마다 극도의 긴장감이 나를 엄습하기 때문에 잘 정제된 대본이 없이는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연극배우도 실전에서는 대본 없이 외워서 대사를 치는데, 나는 대본이 없으면 내 의사를 간결하게 전달하기가 어렵다.
꽤나 공식적인 상황에서 발언을 해야 할 때는, 우선 생물학적으로 말하기 곤란한 상태가 된다. 두 명 이상의 사람 앞에서 말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겨드랑이에서 목뒤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땀이 흥건해진다. 그리고 손이 덜덜 떨리면서 내 목은 갈라지고 쉬어, 누가 들어도 이 상황이 편치 않은, 긴장하고 경직된 목소리가 나온다. 대본을 읽는데도 상황은 비슷하다. 그나마 말을 고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이렇게 하면 주어진 시간 내에 원하는 목적은 달성하곤 하지만 끝나고 나면 알 수 없는 무력감이 찾아온다. 마치 시험에서 커닝을 한 것과 같은 그런 기분이랄까..
며칠 전 대본 없이 보고를 들어간 적이 있다. 언제까지 몰래 스크립트 켜놓고 읽나 싶어서, 이상한 오기가 발동한 것이 화근이었다. 어찌어찌 내용 전달은 하였지만, 자꾸만 머리가 하얘지고 단어가 생각이 안 나서 중간에는 바보처럼 같은 단어만 끊임없이 반복하기도 하였다. 마치 다대다 면접장에서 면접을 시원하게 말아먹은 면접자의 기분을 느끼며, 처참한 심경으로 보고를 마쳤다. 이상하리만치 떨리고 쉰 내 목소리를 들으며 팀원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하며 그날은 집에 서둘러 들어갔다. 집 근처 지하철역에 내리자마자 서러운 마음이 들어 그만 눈물을 뚝뚝 흘리며 집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제 어른이 된 나를, 예전보다 더 어른이 된 엄마는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다. 나라는 사람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미 잘하고 있다고.
내 이야기는, 두려움과 상처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날 불편하게 하는 여러 날 것의 감정들을 꺼내어, 나름의 이유들을 찾아보고 서툴게 전시해 보는 그런 이야기다. 나를 힘들게 하는 요소들을 죽을힘을 다해 이겨내는 게 성장이라면, 나는 성장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무작정 불편한 상황과 마음들을 발 밑에 깔아놓고 못 본척하며 살아갔다가는, 내 마음에 병이 들 것이다. 사실 이미 병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나를 내가 그저 이해해 주고, 보듬어주기 위해서 글을 써보게 되었다. 정제되어있지 않은 그런 글을 쓰기로 했다. 내 감정과 생각들은 너무나 복잡하고, 무언가를 느낄 새면 어느새 희미해질 만큼 스쳐 지나가는 속도도 빠르다. 그렇기에 이것들을 잘 정리해서 보기 좋은 글로 만든 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리해 보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나의 욕심 때문에 번번이 시작도 못하고 실패하였다. 정리하려고 하지 않고, 그냥 나오는 대로 써보려고 한다. 오로지 나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