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인 내 마음속의 꼬마
수많은 말들이 내 입안을 맴돌다 사라지는 건, 아마도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말은 내 속에 떠다니는 생각을 형상화해 주는 수단인데, 난 내 속에 뭐가 떠다니는 건지 전혀 모르는 때가 많다.
기분이 좋거나 편안할 때는 내 속이 텅 빈 무의 상태처럼 느껴지고, 분명하게 마음에 드는 상태임을 안다.
그러나 나를 괴롭히는 건, 주로 내가 불편감을 느끼는 상태, 즉 내 속에 무언가 의미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떠돌고 있을 때이다.
문제는 난, 주로 편하기보다 불편한 때가 많은 예민한 성격이다. 보는 것, 먹는 것, 맡는 것, 듣는 것 모두 나를 괴롭히는 자극들로 가득한 세상이다.
예민한 스스로를 받아들이게 되자, 싫어하고 피하는 것들이 한가득인 경직된 어른이 되었다. 누군가는 나를, 취향이 확실하고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라고 멋들어지게 봐주기도 한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난, 투정 부릴 데가 없어서 그렇지 온갖 것들에 몸살을 쉽게 앓는 나약한 개복치이다.
감각이 예민하다 보니 어떻게든 편하게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 남들보다 덜 수용하고 표출하는 법을 배워왔다.
원하는 것보다 혹은 할 수 있는 것보다 덜 보고, 덜 듣고, 덜 먹고, 덜 맡는다. 방심하거나 욕심을 내는 날엔 꼭 마음이든 몸이든 탈이 났기 때문에, 최대한 나만의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서 엄청나게 많이 신경 쓰면서 동시에, 거의 모든 걸 무시하고 산다. 결코 흘러가는 대로 사는 방식은 아니고, 편하려고 애쓰며 살아내는 방식이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상대의 신체적/비신체적 언어를 몽땅 이해해 버리면, 나에게 불필요한 의미들까지 흡수해 버리고 꼭 개인적인 상처로 돌아왔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꽤나 익숙해진 초연한 마음가짐으로, 누구에게든 적당히 공중에 떠도는 말들로 예의를 지키는 것이 편하다.
서로 무턱대고 자세히 알게 되면 관계가 깊어 짐으로 해서 어느새 쉽게 기대하게 되고, 나도 상대에게 실수를 하게 될 수 있으니까.
내가 정해 놓은 안전 범위 내에서 허용되는 것들만, 그것도 아주 조금씩만 그것도 느리게 표현을 하는 것에 익숙해지다 보니 스스로에게도 솔직하게 털어놓는 법을 점차 잊어버리게 되었다.
내 마음속은 너무나 캄캄하고 그 바닥은 어디가 끝인지 알기 어려워서, 그림으로 그린다면 아주 길고 깊은 첨탑 모양으로 그릴듯하다. 끝은 하주 날카롭게 하늘을 찌르고 있겠지.
분명 그 첨탑 맨 아래 지하에는, 실은 관심도 받고 싶고 이것저것 다 말하고 싶고 다 내보이고 싶은 꼬마가 있다. 내가 스스로 바깥을 둘러 벽을 쌓다 보니, 중간중간 숨 쉴 창문 달아 두는 것도 까먹고 지금까지 와버린 거다.
가끔 구구단도 못 외는 그 꼬마가 아주 크게 울 때가 있다. 탑 전체가 흔들리도록, 온 세상이 무너지도록 울어버릴 때는, 그 꼬마도 탑 주인한테 관심을 조금 받는다. 그래 힘들었구나, 슬프구나 하면서 인정을 받는다. 그렇지만 그 울음소리는 메아리쳐서 꼭대기에 닿은 것뿐, 꼬마가 따뜻한 포옹을 받은 적은 없다. 가끔씩이라도 햇살 위로 올라와, 내 마음이 이러하고 상태가 이러해서 기분이 어떻다고 표현해 주면 좋으련만. 시원하게 울고 나서도 그저 그늘진 곳으로 자꾸만 꼭꼭 숨어 들어갈 뿐이다.
사람은 저마다 맞는 환경이 있다. 누군가는 똥밭이라 해도, 나에겐 꽃밭일 수 있고 그런 것이다.
전 직장은 극도로 개인주의적인 곳이었다. 저마다 회사 외 삶의 영역에 서로를 들이는 법이 적었고, 대화도 관계도 꽤나 피상적이었다. 얕은 대화만 나누는 것이 그때는 따분하고 지겹게 느껴졌었다. 게다가 상당히 권위주의적인 조직 문화로 인해서, 까라면 까! 문화가 강했다. 그럼에도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해 임하다 보니 여러 기회가 주어졌지만, 이미 따분함을 느꼈던 나에겐 똥밭이라고 생각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닮아가는 내 모습이 싫다고 느껴졌을 때, 이직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다 작년에 내가 그리던 꽃밭으로 이직을 했다. 각자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임하는, 상냥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딱 내가 원했던 곳이었다. 수평적인 조직 문화에, 서로가 서로를 알고 싶어 하고 도와주고 싶어 하는 그런 이상적인 분위기였다.
이상하게도, 내가 원하는 환경에 나를 던져 넣고 보니 매일매일이 너무 고역이었다.
나를 표현하는 법도, 상대를 알아가는 법도 제대로 연습해 본 적이 없어서, 이렇게 말랑하게 사방에서 나를 감싸고 품어주는 환경에 있으니 오히려 내가 가시가 된 것 같았다.
내가 할 다음 말을 기대하며 반짝이는 눈빛들도, 그리고 내가 질문을 해주길 기다리는 친절한 표정들도, 모두 나에게 부담이 되어 다가왔다.
죽도록 힘들게 애써서 개척한 나의 환경인데, 모든 게 또 부담이라니 이 무슨 바보 같은 상황이란 말인가?
알 수 없는 커다란 패배감이 나를 짓누르며, 내가 잘 유지해 오던 균형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지켜졌다, 무너졌다를 반복한다.
원래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도 기억이 안 난 채, 가면극만 잔뜩 하다가 퇴근을 하는 기분이다.
사람들이 말을 걸거나, 내가 말을 건네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사실 속으로 수없이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그렇지 못했을 때는 어쩔 줄 몰라하며 그 순간을 위기로 받아들이는 나 자신을 들키지 않기 위해 잔뜩 긴장을 하다가 집에 온다.
그때 그때 내 마음과 생각을 가벼이 꺼내 보일 수 있는 사람이면 좋으련만. 내 속에 있는 이야기에 형체가 없다 보니, 작은 걸 꺼내 보이려도 아주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이 든다.
전 직장에서는 내가 이런 나였어도 크게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야말로 무미건조한 분위기였고, 그걸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굳이 나에 대해 알리려고 애쓸 필요도, 누구에 대해 알려고 할 필요도 없었다.
현 직장에서는 나만 사회 부적응자가 아닌가 생각이 어렴풋이 들게 하는, 이 모두가 사교적이고 발랄한 문화 덕분에 매일매일 어딘가 뻐근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출근을 한다.
그러다 보니,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편안하게 나에 대해 오픈하며 ‘스몰톡‘ 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까지도 해보게 되었다.
이런 마음은 단지 현 상황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기 위함이지, 내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는 아니다.
그게 죽도록 싫고 어려워서, 나는 오늘도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점심시간에, 그리고 외근 때 나만의 조용한 전쟁을 치렀다. 어딘가 어색한 내 표정을 애써 웃음으로 가려가며, 빨리 집에 가서 청결하게 목욕을 하고 조용한 음악을 틀고 머리를 빗고 누워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이렇게 불편감이 가득한 보통의 하루를 보내고 나면, 왜 그랬지 세어보기보다는 흰 페인트로 그라피티 벽을 덧칠하듯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평온한 상태에 도달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다 보면 내 마음을 뾰족하게 알게 되지는 못해도, 첨탑 깊은 곳에 잔뜩 긴장한 꼬마를 편안한 잠에 들게 도와줄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