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지위無爲之爲; 아무 것도 행하지 않음으로써 행한다.
172.
2013년 겨울, 크리스마스가 열흘 남짓 남은 밤, 한 통의 전화가 내게 걸려옵니다.
내가 운영하는 골목의 커피하우스에서 나는 전화를 받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바랐던 일이 현실로 이루어집니다.
내가 쓴 단편소설이 한 일간지의 신춘문예에 당선됩니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이 현실이 되었는데,
어쩐지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담담합니다.
나는 아내와 어머니에게 전화를 겁니다.
아내도, 어머니도 말보다 울음을 먼저 터뜨립니다.
나는 이 상황이 퍽 비현실적이어서 야릇한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무엇보다 기뻤던 것은 여섯 살이 된 큰 뚜루뚜에게
아비가 오랫동안 꿈꾸었던 일에 한 걸음 다가가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나보다 내 꿈을 더 긍휼히 여겨준 아내가 있었기에 나는 쓸 수 있었습니다.
아내가 없었다면 이렇게 멀리 올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뚜루뚜뚜루뚜가 있었습니다.
나는 두려움에 떨며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고,
그 두려움 앞에서 과연 막 생성되기 시작하는 뚜루뚜뚜루뚜의 재능이
어떤 식으로 생겨날지에 대해 나름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피아노’라는 제목을 단 단편소설에 그 고민을 담았습니다.
173.
나는 뚜루뚜뚜루뚜에게 말하곤 합니다.
“아빠는 커피하우스를 운영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이야.”
이따금 주말에 홀로 글을 쓰기 위해 집을 나설 때면
나는 뚜루뚜뚜루뚜에게 세 번 말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아빠는 좋은 글을 쓸 수 있어. 아빠는 좋은 글을 쓸 수 있어. 아빠는 좋은 글을 쓸 수 있어.”
뚜루뚜뚜루뚜가 동시에 합창을 합니다.
그 말은 내게 한없이 힘을 줍니다.
좋은 글이 어떤 글인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그저 내 안에서 나오는 내 글을 쓰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설령 좋은 글을 쓰지 못한다고 해도,
아비는 아비의 자리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하려 애쓰고,
아이는 아이의 길을 떠나면 됩니다.
내가 좋은 글이 어떤 글인지 알지 못하지만 거기에 다다르려고 하는 것처럼,
아이도 자신만의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지만,
그것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아비는 아비의 글을 쓰고, 아비의 인생을 살면 됩니다.
아이는 아이의 선택하고, 아이의 인생을 살면 됩니다.
이미 확고부동한 하나의 답을 내놓아버리면
거기에 고정되어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남겨두고,
우리가
함께,
또 따로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면 됩니다.
그래야 아이 안에 존재하는 고유한 재능을 지켜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174.
장자 철학의 핵심은 ‘무위無爲’입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해석하자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지만,
장자가 말하고자 하는 무위는
‘자연 그대로의 것을 지키며 인위적인 것을 가해 순리順理를 훼손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장자는 ‘무위지위無爲之爲’라는 말로 요약했는데,
이는 곧 ‘아무 것도 행하지 않음으로써 행한다’는 뜻입니다.
장자를 처음 읽다가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게 뭔 개 풀 뜯어먹는 소리래.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생을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부터 차츰차츰 그 뜻을 조금은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먼저 무위지위의 뜻을 좀 더 쉽게 말해보자면,
병법에 등장하는 무위지위를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군을 이끌고 한 장수가 전쟁에 나섰습니다.
장수는 도착 즉시 전투를 나설 듯 했지만,
웬 일인지 성 앞에 진지를 구축하고는 일절 어떤 공세도 취하지 않습니다.
성에 갇힌 병사들은 대군의 움직임을 매일매일 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면 성 안에 갇힌 병사들의 두려움은 점점 증폭됩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포위된 성 안에서 내란이 일어나 스스로 주저앉게 됩니다.
대군을 이끌고 성을 치러 간 장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행한 것입니다.
즉 무위지위를 해낸 것입니다.
175.
나는 오래 전부터 내가 받았던 교육에 환멸을 느껴왔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지만,
우리의 교육이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개선되기는커녕 더욱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실정입니다.
네 개의 보기 중에서 한 개의 정답을 고르는 능력으로
정말 한 사람의 지적 능력을 평가할 수 있다고 믿는 걸까요?
이런 테스트가 기회 자체를 제한하는 데이터가 될 수 있을까요?
출제자의 의도에 맞춰 사고해야 하는 이런 질문의 형태는
어떤 점에서는 대단히 편협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런 ,방식의 시험이 왜 이토록 절대적이어야 하는지 나는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적어도 한 아이가
자기 안에서 꿈틀거리는 자신만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최초의 기회 앞에서 아비로서 아무 것도 하지 않겠노라 다짐을 해온 터였습니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듯 지켜보며 우등과 열등을 나누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하는,
그 참담한 교실의 정반대 편으로 가리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왜 공부를 하는지도 모르면서,
하지 않기는 뭣 하고,
또 하라고 하도 잔소리를 해대니까,
하기는 하는데,
이게 과연 대체 뭐하는 짓인가 하면서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시간들을
내 아이에게는 강요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나는 12살 이전의 기본기를 닦는 동안에는 아이에게 여러 자극을 주려고 애쓰지만,
12살이 되면 아이에게 자유를 주리라 다짐한 터입니다.
12살이 되면 나는 가능한 무위지위를 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할 것입니다.
누군가는 12살이 너무 빠르다고 하지만, 나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돌아보면 이미 12살에, 지금의 내가 되는 과정을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 다짐이 지켜질 수 있기를 빌며 여기에 미리 적어둡니다.
여기에 기록하여 뚜루뚜뚜루뚜가 훗날 아비를 바로잡을 수 있는 빌미를 만들어둡니다.
나는 아비로서 무언가를 하지 않음으로써
뚜루뚜뚜루뚜에게 뚜루뚜뚜루뚜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하고 싶습니다.
176.
아이가 근사한 사람이 되었다면 아이가 근사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면 아이가 훌륭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아이 자신의 그릇에 알맞은 인간이 될 것입니다.
아비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가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할 때에 그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정도일 것입니다.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누가 도와준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나는 부모의 영향으로 아이가 큰 사람이 되는 일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177.
아비는 아이를 지지하면 됩니다.
할 수 있는 한 응원하면 됩니다.
아이가 스스로 자신이 되어가는 것을 최선을 다해 기다려주면 됩니다.
아이는 이미 아이 스스로 자기 자신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알맞은 페이스pace로 자신이 되기 위한 달리기를 이미 시작하고 있습니다.
걸음마를 가르쳐주어서 아기가 걸었던 것도 아니고,
말을 가르쳐주어서 아기가 말을 하게 된 것도 아닙니다.
아기는 혼자 그것들을 해냈습니다.
하지만 기다림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기다림은 피를 말리는 일입니다.
오지 않아도 상관없어, 하고 말한다면,
그것은 기다림이 아닙니다.
문이 열릴 때마다,
문틈으로 찬바람이 들어올 때마다,
문에 달린 작은 종이 딸강딸강 소리를 낼 때마다
혹여 그 사람이 오지 않았나 고개를 돌리는,
애타는 마음이 기다림입니다.
나는 나를 다스려야 합니다.
끈질기게 기다릴 수 있는 아비만이 좋은 아비가 될 수 있습니다.
아이와 나를 분리시키고,
아이의 것을 아이에게 내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아무런 조건없이 아이의 것임을 아이에게 미리 알려주어야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어서,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아이에게 주어진 아이의 시간과 선택은 처음부터 아이의 소유입니다.
178.
장성한 아이가 아주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있는 상상을 합니다.
이 결정을 내리면 한동안은 수정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이는 갈림길에서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합니다.
여러 조건들을 찬찬히 따지며 앞으로 다가올 날들을 가늠합니다.
어떤 조건을 염두에 두고 자신이 무언가를 선택해야 할지 점검합니다.
전망이 있어야 하고,
경제적인 혜택이 있어야 하며,
이것이 자신의 욕망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따집니다.
아이는 손가락으로 조건들을 하나씩 꼽습니다.
나는 아이의 손가락이 하나씩 접히는 것을 봅니다.
아이가 꼽는 그 조건들 중에 ‘아비’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그러니까 그 결정을 목전에 두고 아비의 반응이 어떠할지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면,
나는 비로소 내 아이에게 좋은 아비로 인정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것만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아이는 아비를 잊고 자신의 선택에 몰두할 것입니다.
나는 질문하는 자로서 아이에게 다가가지만,
그 대답만은 온전히 아이의 것으로 남겨두고 싶습니다.
나는 지워지고 아이가 아이의 길을 떠날 수 있다면 근사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아비로서 내가 품은 원대한 야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