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별난 지역이 있었다. 태초에 다른 가용 자원은 없지만 유일하게 존재하는 초원이 있었다. 초원의 연결은 현재의 몽골고원 지역과 중앙아시아에 연결된 권역이다. 만일 이 지역에 적절한 강우가 주어졌다면 농경도 가능했을 텐데 그런 여건이 안 되었다. 주어진 환경에 맞추어 생존하려면 오직 한 가지만 가능했다. 유목이다.
초원은 인공적 노력으로 되는 초지가 아니다. 자연 발생적으로 봄부터 가을까지 저절로 만들어지는 천혜의 가축용 식량 공급지이다. 가축을 위해 하늘에서 뿌려지는 성경 속 만나와 같은 시혜성 식량이다. 인간의 큰 노력 없이 가축이 길러지고 그 가축은 유목민들에게 음식과 입을 옷 그리고 주거를 위한 게르를 만드는 필수 자원이 된다. 심지어 가축의 분비물에서 연료까지 만들어진다.
토지에 대한 욕심의 정도는 농경을 위주로 하는 정주국가에 비해 훨씬 적은 편이다. 유목민들은 어떤 지역을 정복하고 침공해도 필요를 충당하는 약탈이 완료되면 다시 그들의 거주지로 돌아간다. 어쩌면 서로가 필요로 하는 토지의 종류가 달랐다. 농경사회는 농업이 가능한 토지를 구했고 유목민들은 가축이 좋아하는 초원을 원했다.
서로가 같은 것을 찾을 때 갈등이 심화되지만 서로가 찾는 것이 다르니 토지를 두고 크게 다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유목민들은 귀환하면 다시 가축을 키우는 본업으로 돌아간다. 토지에 대한 욕심이 희박한 것은 그들의 생활패턴이 다르기 때문이다.
유목은 여러 가지 가축을 키우며 살아가는 것이 주업이다. 정착민들도 가축을 키우지만 어디까지나 부업으로 한다. 주업은 농경이다. 장성 접경지역에 거주하는 일부 남방 유목민들은 반농반유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었다. 유목민의 가축 중에서 가장 많은 종이 양이다. 성경에 자주 나오는 양은 대장 말을 잘 듣고 온순하게 순종하며 때로 길을 잃을 정도로 인식된다. 그러나 큰 무리를 이루는 양 떼는 통제를 해야 된다. 행동도 느리고 둔해서 강력한 통제가 필요하다.
다른 지역인 대양주 같은 곳에서는 셰퍼드 같은 개를 통해서 양들을 통제하고 있으나 몽골고원의 유목민들은 주로 사람이 이를 통제한다. 이때 관리하는데 필요한 가축이 말이다. 가장 효율적으로 양을 통제하려면 기동성이 있는 말이 가장 적격이었다. 몽골고원에는 한정된 인적 자원이 있어 양 떼를 여기저기로 수시로 이동하려면 말없이는 유목생활이 될 수가 없다. 그래서 유목인들은 말과 사람이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하나의 동일체가 되었다. 거기에 하나가 더 추가되는데 최고의 무기인 복합궁 활이다. 바로 이것이 다른 지역에서는 탄생이 어려운 기마 유목민족이 생성되기 시작한 유래이다.
그중에서 북방 아시아권에서 큰 유목민족이 발흥했는데 이들이 바로 흉노이다. 기원전에도 십여 세기 전부터 그들은 존재했는데 유목민족에 대한 정확한 역사 기록이 나온 것은 사마천의 사기 기록에서부터였다. 하나같이 유목민족에게는 가장 혐오스러운 이름이 붙었다. 험윤, 귀방, 마방, 흉노, 서융, 곤융, 훈죽, 동호, 임호, 이적 등으로 불렸다. 노예를 의미하는 奴를 붙여 흉노라 칭하게 되었다. 전국시대에서는 그들을 주로 胡라고 불렀다. 오랑캐라는 의미이다. 동쪽에 있으면 동호이고 서쪽에 있으면 서호이다. 蒙古도 가장 열등하게 부르는 이름 중에 하나이다.
흉노가 등장하여 중원을 침공하는 시대가 열린 것은 동아시아 역사에 커다란 전환기가 된다. 바로 흉노가 공격하는 패턴이 그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기마군단 전술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소수의 기마병이 있기는 하였다. 전국시대 중원에서는 단지 존재한다는 구색을 갖춘 정도의 기마병이 있었다. 그런데 유목세력은 전혀 다른 파워를 가진 기마 군단이었다. 그들과 직접 대항할 군대가 없을 정도로 막강한 기마 군사력이었다.
북방 흉노를 대비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들이 남침하지 못하게 긴 방어벽을 쌓는 장성의 건립이었다. 전국시대 진, 조, 연 나라 모두가 긴 장성을 쌓았고 진나라가 통일된 이후에 3국의 장벽을 모두 연결하여 흉노 대비형 장성을 완성했다. 만리장성이라 하는 긴 장벽이 만들어졌다. 한 동안 대비 효과가 높았다. 실제로 일 순간 흉노의 침공이 뜸했다. 높이만 해도 약 5M에 이르기 때문이다.
만리장성 이야기를 조금 더 해야 하겠다. 장성은 시대에 따라 계속 가꾸어져 왔다. 초기 진나라 시대에는 흙으로 만든 토성이 대부분을 이루었다. 장성이 영원히 그 분리효과를 유지한다고 생각했지만 반대로 장성을 뚫고 침공하는 방법도 개발되어 유명무실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장성의 형태가 구운 벽돌과 돌로 만들어지고 굳게 다져진 때는 명나라 시대였다.
사실 진시황이 만든 것은 초기에 건립된 형식적 장성이었다. 그가 만든 북과 남의 구분용 장성 라인은 상호 이질적 국가가 되는 단초를 만들었다. 한쪽은 완벽한 농경사회이고 북쪽은 철저한 유목사회로 굳어졌다. 장성 사이에 평화적 교역은 없어지고 대신 공격과 약탈의 시대가 되었다. 실제로 장성을 사이에 두고 북방과 중원 세력은 약 10세기 이상을 상호 적대적 관계를 유지해 왔다.
유목제국을 이야기할 때면 항상 부수되는 약탈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척박한 초원지역에서 생산되는 자원은 한계가 있었다. 즉 그들에게 생존을 위하여 외부세계와 교역은 필수적 조건이다. 통상 접경지역에서 상거래를 위한 관시, 마시 등의 국경시장이 열렸다. 주변국들은 평화시기에 국경지역에서 물자의 거래를 허용하지만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상대의 생존에 필요한 교역 물자의 제한 등으로 갈등을 유도했다.
이 결과 유목민들의 침공과 약탈로 이어지는 패턴이 수세기에 걸쳐 이루어졌다. 유목제국의 세력이 강했을 때는 중원제국으로부터 조공을 받기도 했는데 생활에 필수적인 물자와 인력 그리고 가축 등도 그 목록에 있었다. 또한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이 때는 물자는 물론이고 그 외에 부족한 여성자원과 특수한 기술을 가진 기술자 등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유목세계는 그들 생활방식에 따라 정주세계와 다른 독자적 페르소나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공동체 의식이 아주 강했다. 개인주의나 가족보다도 집단주의 협력심이 더 우선시하였다. 그들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 서열이 달라졌고 개인 성장의 기회가 열렸다. 또한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개념이 얕아 상호 갈등도 없었다.
유목민들은 대부분 동일한 생활 습속에 젖어 있어서 빈부의 개념도 훨씬 적었고 사회불만과 반란 등이 정주제국과 천양지 차이였다. 정주국가에서 보이는 보수성과 달리 진보적 사상을 견지했다. 양성 평등을 비롯한 평등사회가 이루어졌다. 몽골의 칭기즈칸은 “나는 병사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밥을 먹고 그들은 내 이름을 불렀다”라고 말했다.
마지막 정리하면 유목제국에 대한 역사 기록은 극히 제한적이다. 그들 자체적으로 쓴 문자기록이 없고 정주 제국들의 부수적 역사 속에 명맥만 유지되었다. 주가 아닌 종으로 서의 역사이다. 달리 말하면 왜곡되고 편향된 역사의 편린을 보고 역사 추정의 조각을 맞추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들은 로마제국의 영토를 넘어서는 거대 제국이다. 흉노, 훈, 몽골 다 마찬가지다. 세계를 크게 뒤흔든 불의 제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