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를 거역하자.

숫자는 숫자에 불과할 뿐

by 강찬욱


스포츠가 감동적인 것은 대부분 ‘숫자’에 기인한다. 기록경기들은 그 결과와 승패가 숫자로 결정 나고 그 숫자를 낮추거나 높이기 위해 무수한 땀을 쏟아낸다.

‘데뷔한 지 몇 년 만의 우승’의 그 몇 년도 숫자고 ‘앞으로 절대 깨질 수 없는 … 연승’의 그 몇 연승도 숫자다. 그 감동적인 숫자들 중에 더욱 감동적인 것이 바로 ‘나이’다.

최연소 우승 혹은 최고령 우승이다. 소년이 성인들을 이긴다. 어린 소녀가 성숙한 성인선수를 이긴다. 때론 40대가 20대를 이기고

숫자의 차이가 클수록 드라마는 더욱 극적으로 쓰인다. 시상대에 올라 있는 혹은 트로피를 들고 있는 선수가 어리면 어릴수록 그리고 나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감동적이다.

여기저기서 퇴물이라고 평가받는 한물 간 선수가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고 혼신의 노력을 다한 끝에 우승하는 스토리는 한 편의 영화와도 같다.

실제로 이런 많은 실화들이 영화화되었다. 크리스티앙 호날두는 마흔을 1년 앞두고 있고, 메시나 레반도프스키도 3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다.

이들이 국가대표든 클럽이든 그 팀을 챔피언에 올려놓는다면 그들의 역사의 끝에서 가장 극적이고 감격적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상식적인 숫자를 거역하는 비현실적인 숫자에 우리는 감동받는다. 취미도 마찬가지고 취향도 그렇다. 남자들의 로망 중엔 ‘스포츠카’가 있다.

카브리올레나 컨버터블이라고 얘기하는 ‘뚜껑이 열리는 차’다. 남자는 나이가 들어 백발이 되었을 때 빨간 스포츠카의 운전석에 앉아 있는 로망이 있다.

나이 든 남자의 스포츠카는 남자의 멋이 나이를 거역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나이 들어도 청바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20대 때의 사이즈를 지키려고 엄청난 노력을 쏟아붓는다. 나이 들수록 늘어나는 허리사이즈의 숫자를 거역한다.

무언가를 좋아하고 빠지는 데 나이라는 숫자는 시작부터 삐걱거리게 한다. 좋아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숫자로 판단하고 결정한다.

할아버지가 로봇 피겨를 좋아하면 안 되는가. 힙합을 좋아하면 안 되는가. 젊은 사람들은 판소리를 좋아하면 안 되는가. 우리는 숫자를 거역할 때 반전의 묘미가 있다.

무엇을 시작하기에 어린 나이란 없다. 늦은 나이 역시 없다.

누군가 최연소의 기록을 깨고 최고령을 기록을 더 많은 나이에 닿게 한다면 그만큼 그것을 할 수 있는 범위를 늘려 놓는 것이다.

멋지게 사는 법 중 가장 전제되어야 할 것이 ‘나라는 주체’로 사는 것이다. 내 인생을 내가 주관하며 사는 것이다.

세상이나 남들의 주체에서 나에게 끌어오려면 우리가 상식적이라고 믿는 것들을 깨는 과정이 필요하다. 가끔 ‘철없다’라는 말을 많이 듣는 사람들이 철이 꽉꽉 들어선

사람들 보다 행복해 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다.

인생에서 숫자는 나이뿐만이 아니다. 돈도 숫자다. 시간도 숫자다. 살고 있는 집의 넓이도 숫자고 자동차의 배기량도 숫자다.

이 모든 것들을 합리적으로 고려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지만, 아주 가끔은 지나치게 계산적이기보다는 이 숫자들을 거역해서 살아보는 것도 인생을 풍부하게 만든다.

일종의 ‘무리하기’다. 가진 것에 비해서 갖고 있는 숫자에 비해서 좀 무리해 보자는 것이다. 세상은 홈푸어라고 또는 카푸어라고 손가락질하지만, 본인이 만족하면

그런 삶을 가난하다고 ‘푸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가. 코로나 이후 MZ세대들이 골프를 많이 시작했다. 몇 년 해보니 돈, 시간, 노력 등 여러 가지가 ‘드는 운동’이다.

그래서 몇 년 해보다가 결국 포기하고 골프용품등을 중고시장에다가 내놓았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들을 ‘골프푸어’ 혹은 ‘골푸어’라고 칭하면서 말이다.

나는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해보고 싶어서 무리하는 것에 대해서 긍정적인 편이다. 우리는 안 할 자유가 있지만 해보고 안 할 자유도 있기 때문이다.

한 번쯤 내가 갖고 있는 숫자들, 나를 규정하는 숫자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이 숫자를 통해 사회가 권장하는 것들을 거역해 보자. 거역하지 않으면 재밌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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