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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생끝에골병난다 May 25. 2023

삶에는 모험이 없고, 우린 고작 직장인이 되려고.

어쩌면 이건 마리오의 몽상일지 모른다.

삶에는 모험이 없고, 우린 고작 직장인이 되려고.

-<슈퍼마리오 브라더스> <토이스토리>

인스타그램 @garbageidea



너무 늦기 전에 <슈퍼마리오 브라더스> 본 얘기를 해야겠다. 군 복무 중에 극장에 갈 기회는 정말 많지 않다. 소중한 주말 외출 날에 남들 다 보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포기하고 이 영화를 고른 이유는 두 가지다. 일단 부대에 배급되는 <씨네21>의 소개 기사를 읽다 호기심이 생겼다. 더 중요한 이유는 만화 영화를 좋아하는 후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하고 나서야 더빙판을 예매한 걸 알았다. 더빙으로 만화 영화를 보는 게 얼마만이었지 모르겠다. 그래도 초반의 어색함을 견디고 나니 볼 만했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마리오 형'의 몽상일지 모른다.


완벽하게 분업화된 사회에 개인이 성취를 이룰 공간은 없다. 삶에는 모험이 없고, 우리는 고작 직장인이 되려고 인생을 바친다. 혁명이란 단어는 농담의 소재가 되었다. 실패한 신자유주의의 시대엔 양질의 일자리마저 부족하고, 자영업을 시작해봐도 경쟁이 가혹하다. 시스템이 노후를 보장해주지 않으니 너도나도 창업을 한다. 또다시 각개전투에 나선다.


'마리오' 형제는 배수관 고장으로 혼란에 빠진 뉴욕을 구하려다 의문의 초록색 파이프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형제는 파이프 너머의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다. 위험에 빠진 동생을 구하기 위한 마리오의 모험이 영화를 이끌어 간다. 뭐 하나 되는 일이 없던 배관공 업체의 사장님 '마리오'가 성취를 이루고 사회적 인정을 얻을 수 있는 곳은 '피치 공주'가 사는 가상 세계 뿐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배수관을 고치려 나선 배관공 '마리오'의 행동은 노동을 통해 공동체에 기여하고 인정을 얻고 싶다는 인간의 기본적 욕망을 드러낸다. 촘촘한 연결망과 권력 관계 속에서 내 몸과 정신조차 통제하고 보호할 수 없는 수동적인 생존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공동체를 구하기 위한 능동적인 삶은 '파이프' 너머의 가상 세계에서만 가능했다. 그래서 모험이 끝나고 브루클린에 돌아왔지만 형제는 여전히 가상 세계로 출근한다.

이야기는 그리 전복적이지 않다. 주위의 인정을 받지 못하던 형제가 일련의 모험을 거친 뒤 사회적 인정과 사랑을 거머쥐고 정상성의 고리에 안착한다. <라이온킹>에서 '심바'는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보수적 사회를 떠나, 평등하고 자유로운 '하쿠나 마타타' 사회에 도착한다. 하지만 영화는 '심바'가 결국 공상적 유토피아를 떠나 권위적 현실로 돌아와 인정을 얻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보수적 서사를 채택한다. <마리오> 또한 현실을 떠나 가상 세계로 도피하지만, 결국 현실로 돌아오고 만다. 주인공이 모험을 떠나 예싱치 못힌 교훈을 얻고 돌아온다는 '귀환의 플롯'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 마리오 형제가 여전히 가상 세계로 출근한다는 설정을 제외하면 특별할 것이 없는 이야기지만, '피치 공주'를 자애롭고 유능한 리더로 재해석한 시도에서는 세심함이 돋보였다.


이제 나는 꿈 속에서도 영웅이 아니지만


영화는 충분히 유쾌한 체험을 제공한다. 캐릭터도 과할 만큼 귀엽다. 익숙한 효과음과 배경 음악 덕분에 귀가 즐겁고, 게임을 하는 듯한 화면 묘사가 화려해서 눈도 바쁘다. 우리는 왜 굳이 극장에 갈까. <씨네21> 김혜리 기자는 '양질의 시간을 체험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1인칭과 3인칭을 오가며 '게임을 하는 듯한 체험'을 제공하는 '슈퍼마리오'는 충분히 극장에서 볼 만한 영화의 모델을 제시한다.


언론은 MZ세대가 색다른 체험에 소비를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소유는 너무 멀리 있 목표이기에 경험으로 일상을 채운다. 그럴 만도 하다. 초봉은 십수년 째 200만 원인데, 짜장면은 7천 원인 아포칼립스 아니던가. 그러니까 딱히 세련된 이유는 아닌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세상을 구하는 모험은 이제 꿈 속에서도 불가능하다. 우리는 존재감이 사라진 자아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체험을 갈구한다. 세계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경험'이 아닌, 생경함 속에서 나를 이해해보려는 발버둥으로서의 '체험'을 중시한다. '넷플릭스''왓챠'의 시대에 극장은 위기를 맞았지만, 체험을 중점에 둔 <슈퍼마리오 브라더스> 같은 영화는 주말에 다시 극장에 갈 씁쓸한 이유를 제안한다.


우리에겐 더 많은 모험 이야기가 필요하다. 기술이 발전하고 제도와 분업이 치밀해질수록 사람들은 대체 가능한 존재가 되어간다. 도시가 커질수록 우리는 작아진다. '너 없어도 회사 잘 돌아가' 같은 대사는 개인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현대의 증상이다.


세상은 꿈 꾸는 거위처럼 날아오르라고 등을 떠밀지만 안전망은 없다. 여기서 무슨 꿈을 꾸겠는가. 추락한 자에게 다시 일어나보라며 내밀어주는 손 하나 없다. 그들이 제시하는 꿈이라는 것도, 하나같이 시시하고 피곤한 것들 뿐이다. 그래서 '계란 fry처럼' 눌러붙고, 높은 곳을 우러러보는 대신 흘러가고 싶다는 노래(후라이의 꿈, AKMU)가 인기를 끄는 것이다.


<LOVE LEE. AKMU>


"어서 남의 꿈을 빌려 꾸기라도 해." "왜 그렇게 봐 난 죄지은 게 아닌데." 꿈 없는 젊음을 비난하면서, 막상 꿈을 향해 달려가는 이들의 열정을 쥐어짜 동력으로 삼는 사회다. 여기서 무슨 꿈을 꾸겠는가. 이런 사회의 질서를 만들어온 이들에게는, 게임처럼 헛된 쾌락과 몽상에 빠져드는 마리오의 청춘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집에 오는 길이 너무 멀' 정도로 힘들게 살았지만, '노바디'가 되어버린 우리 이야기. '후라이의 꿈'에도 인용된 달팽이의 모험 이야기가 떠오른다. 사실 우리는 꿈이 없는 것이 아니다. 공감과 인정, 휴머니즘 속에서 나 답게 존재하고 싶다는 욕망이야말로 가장 높이 있는 꿈이다. 단지 그 효율적이지 않은 정념이 '꿈'이라 명명되지 않을 뿐이다. 세상이 꿈이라 부르는 것, 무언가 되어서 무언가를 이루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막상 꿈을 향해 몸을 던져보면, 노력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신화가 거짓이었음을 알게 된다. 다시 나를 일으키고 독려해줄 관용은 극한 경쟁의 열기에 말라버린지 오래다. 모든 걸 바쳤지만 꿈은 산산히 조각난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남은 꿈들은 하나같이 시시하다. 그럴 때 우리는 바다를 건널 달팽이 이야기를 듣다가 소리도 못 내고 우는 것이다. 도시를 가득 매운 유리 빌딩 그림자 속에서.



집에 오는 길은 때론 너무 길어
나는 더욱 더 지치곤 해
문을 열자마자 잠이 들었다가
깨면 아무도 없어
좁은 욕조 속에 몸을 뉘었을 때
작은 달팽이 한 마리가
내게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줬어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칠은 세상 끝 바다로
갈 거라고
아무도 못 봤지만
기억 속 어딘가 들리는 파도
소리 따라서


(달팽이, 패닉)







만화 영화를 보고 과몰입한 이야기를 짧게 덧붙여야겠다. 추석 연휴 동안 <무빙>을 보려고 '디즈니 플러스'를 구독했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내가 이틀 동안 <토이스토리> 4편을 정주행하고 있을 줄은.


'나는 게 아니라 멋지게 추락했을 뿐이야!'


20세기에 시작해서 2019년에 끝난 '토이스토리' 시리즈는 시대의 변화와, 변하지 않는 진실을 동시에 보여준다. 장난감은 결국 버려지는 존재라는 점에서 유한한 인간을 닮았다. <토이스토리 1>에서 장난감에게 인간은 절대적 권능을 지닌 세계다. 보안관 '우디'는 자신이 아이의 사랑을 독점하는 가장 소중한 존재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신상 장난감 '버즈'가 나타나자 모든 믿음이 무너진다. '버즈'의 행복을 질투한 '우디'는, 그 역시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진실을 알려주려 애쓴다. '넌 사실 나는 게 아니라 멋지게 추락하고 있을 뿐이야.' 사실 자신이 별로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행복이 끝난다는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다.


'우디'와 '버즈'는 주인 '앤디'가 분실하는 탓에 낯선 세상을 떠돌게 된다. '우디'는 어떻게든 아이의 품으로 돌아가려 노력하지만, '우디'는 협조해줄 생각이 없다. 불시착한 지구를 떠나, 자신이 태어난 우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디'에게도 우울한 진실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는 TV 광고에 등장하는 수많은 상품 중 하나였으며, 당연히 하늘을 날 수도 없다는 시시한 존재의 한계와 직면한 것이다. 좌절한 그에게 '우디'는 자신의 열등감을 털어놓으며 말해준다. '앤디가 널 사랑하니까, 그와 함께일 때 넌 가장 소중하고 가치있는 존재라고. 우리는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태어났다고'.


장난감은 아버지가 부재한 '앤디'에게 아버지를 대신하는 존재인 동시에, 관계와 사랑을 통해서만 존재의 가치를 찾을 수 있는 인간의 운명을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디즈니 플러스에서 서비스되는 시리즈 <무빙>에서도 비슷한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정원고등학교' 교실 뒷편에는 '나도 쓸모가 있을까?'라는 글씨가 적혀있다. 민주화가 정착되며 스펙터클의 권력이 소멸하고, '구룡포'는 사무실과 지하철에서 서류철처럼 접힌 채 일상을 반복한다. '쓸모 없는 인간이 된 것 같다'며 한탄하던 그에게, 그의 애인은 '너는 내 쓸모고, 나는 네 쓸모라고' 말해준다. 현대 사회는 인간의 '쓸모'를 강요하며 우리를 영원한 불안으로 몰아넣는다. 사랑하는 존재만이 우리를 쓸모 있게 해준다. 사랑하는 사람은 신처럼 전능하게 나를 구원하고 벌한다.


<토이스토리 1>에서 장난감의 주인인 아이는 전능한 권력을 행사한다, 지배 양식은 집을 단위로 달라진다. 난폭한 옆집 아이의 장난감 학살(?)을 저지하는 것은 폭력에 맞선 장난감들의 반란이었다. 찢기고 부서지고 엉터리로 조립된 장난감들은 목소리를 드러내고 아이에게 말해준다. '우리를 소중하게 다루라고!' '우디'와 '버즈'는 다정한 구체제로 무사히 회귀한다. 장난감들이 지배 질서를 전복하지 않으며 다정한 권력 아래에서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토이스토리 1> 또한 보수적 서사이다. 사실 사랑과 연대로 공동체를 다정하게 유지하면 전복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디'는 옆집 아이에게서 더 큰 권력의 폭력을 경험하고, 자신이 수많은 상품 중 하나에 불과했다는 보편성 아래 스스로가 '보통의 존재'였음을 깨닫는다. 초월자로서의 남성적 모델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소년은, 영화가 끝날 무렵 인생이 '나는 것이 아닌 멋지게 추락하는 것'임을 받아들인다. 탄생부터 불시착이었다면, 자세를 잡고 멋지게 추락하면서 의미를 부여하고, 주변을 돌보면 되는 것이다.


이야기가 끝났지만 우디는 여전히 공동체를 수호하는 남성 모델을 이어가며, 여성 케릭터 '보 핍'은 남성 캐릭터에게 인정을 베풀고 성적 접촉을 제공하는 수동적 역할에 머물러 있다. 작은 반란을 일으키지만 <토이스토리 1>의 한계는 명확하다. 폭정보다야 다정한 질서가 낫겠지만, 장난감에게 제시된 행복한 삶은 인간의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를 달리게 하는 것


2편과 3편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된다. <토이스토리 2>에서 장난감 업체의 사장은 단종된 피규어를 일본 박물관에 팔아 큰 돈을 벌 생각으로 '우디'를 납치한다. '우디'는 선택을 요구받는다. '앤디'의 곁에서 유한한 사랑을 받는 삶과, 시시하지만 영속적인 생활이 가능한 삶. 우디는 다시 한 번 뜨거운 사랑과 현재에 충실한 삶을 선택한다. 가만히 머무르며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는 인생은 살아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디를 머무르지 않고 달리게 하는 것은 늘 관계와 애정이었다. 그것만이 우디에게 유한하지만 진정으로 살아있는 순간을 선물해준다. 아이의 달라진 눈빛에 언제든 상처 받을 것이다. 끝내 버림 받겠지만, 상처와 유한성은 생명의 증거이기도 하다.



<토이스토리 3>에서도 우디와 장난감들은 앤디에게 돌아간다. 이번에는 자본가 대신 탁아소의 독재자 인형에 맞서 달린다. 장난감들이 직면하는 갈등은 언제나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위기들이다. 탁아소를 지배하는 집단은 감시와 통제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 자아를 가진 존재들을 수단화한다. 기존의 군중은 저항을 포기하고 순종했지만, 앤디의 장난감들은 다시 한 번 탈출을 감행한다. "우리가 서로를 더 평등하게 대하면 탁아소는 더 좋은 곳이 될 수 있어." 장난감들은 이제 소각되기 직전까지 내몰렸지만, 이번에도 앤디의 품으로 돌아가고야 만다. 소멸의 운명을 받아들인 장난감들은 말해준다. 언젠가 우리는 버려져서 땅 속에 썩겠지만, "함께하는 동안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무한의 세계를 향해", 멋있게 추락할 것이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어린 시절, 그때 장난감들은 살아있었다. 우리는 장난감의 이름도 목소리도 잊었지만, 무의식 속에 그들은 남아있다. 무표정하게 축 늘어진 장난감들이 우리를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무표정한 얼굴 속에도 장난감과 함께한 시절은 각인되어있다. 유한한 우리 존재의 목적이 사랑을 나누는 것이라면, <토이스토리 3>의 엔딩 같은 마지막 바란다. 마지막으로 한 번은 사랑한 존재들과 아름다웠던 시절을 반복할 수 있기를. 묘한 미소를 띄우고 나른한 이별을 맞을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가 언젠가 잊혀지고 버려질 존재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한 시절 사랑했다면, 우리가 서로를 평등하게 대한다면, 무표정한 인생이지만 충분히 아름다운 이야기였다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품을 떠나도 괜찮을지 몰라


2019년에 개봉한 <토이스토리4>는 시리즈의 결핍을 완벽하게 해소한 채 서사를 마무리한다. 우디는 '포키'에게 아이의 사랑을 받는 것이 장난감의 존재 목적임을 이해시킨다. '그 애는 내가 필요해!' 포키는 그렇게 존재의 이유를 깨닫고 아이의 곁을 지킨다. 아이가 나를 필요로 하기에, 포키는 더 이상 자신을 쓰래기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장난감이야!"


반면 우디는 이제 아이의 사랑을 받는 장난감이 아니다. 이전 시리즈에서 수동적 여성상을 재현하던 '보 핍'을 따라 우디는 인간의 품 바깥의 삶을 향해 나아간다. 그간 <토이스토리> 시리즈는 장난감에게 인간이라는 질서 바깥의 선택지를 제시하지 않았다. 보핍은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선택한 최초의 개척자다. 장난감들은 굳이 주인의 품이 아니여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들이 행복할지는 모르겠으나,

어쩌면 사랑했던 자의 품을 떠나도 괜찮을지 모른다.


사랑은 전능하기에 종속일 수 있고, 영원할 수 없기에 사슬 수 있다. 끝난 시절을 끊고 나아가야 한다. 졸업하고도 학교를 떠나지 못하던 아이의 마음을 기억한다. 교복을 버렸다는 부모님의 통보가 소중했던 시절과의 단절처럼 느껴져 서러웠다. 훌쩍 자라버린 아이를 놓아주지 못하는 부모의 마음도 비슷할 것이다. 그럼에도 시간의 흐름을 붙잡고 살아갈 수는 없다. 지나간 시간을 박제할 수 있는 것은 예술 뿐이라 그 무용한 것들이 가치있는 것이다. 새로운 소중함은 우리가 찾아가야 한다. 자연스러운 상실감을 은폐하는 대신 충분히 슬퍼해야겠지만, 그것에 종속되어 있는 대신 새로운 생활을 꾸려야 한다. 또다른 사람과 새로운 풍경의 아름다움에 함께 감동을 나누는 삶을 향해 다시 달려야 한다. 누가 아는가. 익숙함 바깥에 새로운 세계가 무한히 기다리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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