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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생끝에골병난다 Jun 10. 2023

이런 시대를 건너려면

셰이프오브워터. 탑건 매버릭. 앨리멘탈

-경계 짓는 시대를 위한 <셰이프 오브 워터>, 그리고 노자


노자 사상에서 바람직한 삶의 형태는 물에 비유된다. 물은 아래로 흐르고, 아래에 머문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고, 막히면 옆으로 흐른다. 그러니까 선한 것은 물의 모양이다.

기예르모 델토로의 영화 <셰이프오브워터: 사랑의 모양>에서 물은 사랑에 비유된다. 소련과 미국의 냉전 시대가 영화의 배경이다. 매카시즘, 그러니까 '빨갱이 몰이'가 횡행하던 군인들의 시간이었다. '내 편 아니면 공산전체주의!'

영화의 악역인 미군은 물 속에 사는 괴생물체를 잡아서 해부하려 한다. 과학을 발전시켜 소련을 앞지르자는 것이 목표다. 그들은 인간과 비인간을 경계 짓고, 이념과 젠더로, 국적과 정체성으로 사방에 벽을 쌓는다.

하지만 언어장애를 가진 청소부 앨라이자는 괴생물체와 사랑에 빠진다. 소련 정보부의 요원도 이 생명체에게 지능과 공감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제 괴물을 구출하기 위한 청소부와 소련 비밀요원의 협동 작전이 시작된다. 앨라이자를 보살펴주는 가난한 화가와(이 화가는 성소수자다), 그녀의 흑인 여성 동료도 작전에 가담한다.



영화의 제목이 '셰이프 오브 워터(물의 모양) : 사랑의 모양'인 것이 의미심장하다. 물의 모양은 무엇일까.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글게 담기고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낳게 담기는 유연함 탓에 물의 모양은 정의할 수 없다.

모양이 생기려면 경계가 필요하다. 물은 경계를 넘어서 흐른다. 조금의 빈틈만 있어도 그 속을 비집고 들어간다. 그래서 '사랑의 모양'은 '물의 모양'이다. 근대는 경계를 짓지만, 사랑은 경계를 넘어서 흐른다. 문을 막아도 욕조의 물이 새어 나가고, 극장 천장에서 뚝뚝 떨어진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소수자 간의 사랑 이야기지만, ''인간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도 이어진다. 언어 장애를 지닌 여성이 사랑하는 것은, 사람과 똑같이 느끼고 생각하지만, 이상한 생김새 탓에 괴물 취급을 받는 존재다.

델토로의 최신작 <피노키오>에서는 이런 질문이 깊어진다. '피노키오'는 인형이라 멸시 당한다. 관객이 보기엔 다 똑같은 인형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대체 '정상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시대가 바뀔 때마다 정상적인 것의 기준도 달라진다. 그건 우주에 존재하던 법칙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규칙일 뿐이다. 정상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있지도 않은 개념에 맞추려고 사는 것은 우리를 영원히 피곤하게 만들 뿐이다. 델토로의 영화가 '정상성' 보다 '인간성'에 천착하는 이유다.

영화에서 군인이자 백인 남성인 악역은 자기야말로 인간의 보편적 형상일 것이라 믿는다. 그는 흑인과 여성, 장애인을 멸시하고 쉽게 사람을 죽인다. 그가 멸시한 괴물은 어떤가. 그는 편견 없이 앨라이자와 공존하고, 사랑으로 차별의 시대에 저항하며 치유한다. 다시 질문해보자, 인간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탑건: 매버릭


시대가 달라지고 있다. 영화 속 미국과 소련의 냉전도 끝났고, 미국이 세계의 경찰이던 시절도 끝났다. 미국은 이제 국경에 장벽을 쌓고, 동맹국을 경제적으로 압박한다. 아저씨가 된 톰 크루즈의 <탑건: 매버릭>과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은 쇠락하는 미국의 황혼을 보여준다. 톰 크루즈는 늙었고, 적은 다양해졌다. 영화에서 미국은 더 이상 기술적 우위를 자신하지 못한다. 기술 발전과 변화는 두렵고, '피플 파워', 아날로그로의 회귀를 제시한다.


더는 단독으로 세계의 도전을 받아낼 수 없음을 직감한 엘리트 계층은 미국이라는 브랜드 파워를 앞세운 이민자 확보로 돌파구를 찾으려 한다. <2030 축의 전환>의 저자 마우로 기옌은 미국의 인구 감소와 경제 후퇴의 대안으로 관대한 이민 수용 정책을 제시한다. 사람들의 편견과 달리, 이민으로 확보한 고급인력과 노동력은 사회 보험에 긍정적인 효과를 제공하며 창업과 혁신을 활성화하고, 몰락한 공업 도시를 살려내기도 했다. 아인슈타인도, 버락 오바마도, 스티브 잡스도 앵글로색슨족이 아니다. 심지어는 앵글로색슨족도 이민자였다. 미국의 패권 확보는 이민으로 가능했다. 다양성 확보에 미국의 미래가 달렸다.


게이가 많은 도시가 창의적이라는 연구가 있다. 미국의 경제학자 리처드 플로리다가 제시한 3T이론이 그것이다. ‘관용(Tolerance)이 재능(Talent)있는 사람들을 모으고, 기술(Technology)을 발전시킨다’는 이론이다. 여기서 도시의 관용은 '게이지수', 그러니까 동성애자의 비율로 측정된다. 어떤 사회에서든 끝까지 차별 받는 동성애자들이 모여드는 도시는 상대적으로 관용적인 곳이고, 그런 도시들이 창의적 혁신과 발전을 이뤘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다양함에 대한 관용과 조화를 강조하는 <엘리멘탈> 같은 영화가 끊이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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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모습은 언제나 변화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변화할 미래 사회의 성격은 우리가 규정한다. 기술 발전에 따른 생산력의 비약적 향상은 무궁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제 ‘노동이 필요 없는 시대’가 다. 실업과 불평등이 증가하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지만, 시스템이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그간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문명이 기다릴지 모른다. 그러려면 사람의 역할이 중요하다. 사람 사이의 논의와 합의, 그것을 중재할 정치가 필요하다.


주위를 둘러보자. TV 뉴스를 틀어보자. 사람 같은 사람이 얼마 없다. 이대로라면 인간은 인간이 만든 기계에 밀려날 것이다. 이미 소수가 과실을 독점하고 있다. 인류가 만들어낸 기술과 시스템은 빠르게 불어나고 있다.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부터 그것에 잡아먹히고 있다. 인간보다 뛰어난 기술이 인간을 밀어내는 시대라서 가장 먼저 예술이 묻는다. 필요도 없어진 인간이 여전히 소중한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천선란 작가의 <천개의 파랑>도, 스티븐 스필버그의 <에이 아이>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물처럼 아래로 흐르고, 서로를 이롭게 하고, 막히면 옆으로 흐른다. 해양 괴물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 욕실을 가득 물로 채우는 앨라이자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주변을 가득 채우고, 고르게 흐르고, 틈새가 보이면 뚝뚝 흐른다. 선한 것이 물의 모양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차별과 혐오의 시대를 이겨낼 힘이 있다. 착취와 억압의 역사를 끊어낼 힘이 있다.

다양성과 관용에 미래가 달린 것은 우리도 다르지 않다. 인구가 줄고 성장이 정체되며 사회에 극단주의가 팽배해지는 것은 2020년대 한국의 증상이기도 하다. 김대중 정부부터 논의가 이어진 차별금지법 하나 만들지 못한 우리는 얼마나 소멸의 미래에 대비하고 있나. 기술과 소외의 파도 앞에 얼마나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나. 영화의 가장 극적인 순간에 흐르는 노랫말로 글을 마치려 한다.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모두 고르게 소중한 마음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가사다.



"그대의 모양 무엇인지 알 수 없네, (Unable to perceive the shape of you,)
내 곁에는 온통 그대 뿐. (I find you all around me.)
그대의 존재가 사랑으로 내 눈을 채우고 (Your presence fills my eyes with your love,)
내 마음 겸허하게 하네, (It humbles my heart,)
그대가 모든 곳에 존재하기에... (For you are everywhere"

(You'll never know', Renee Fle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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