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dy joo Aug 28. 2023

나만 아는 논쟁

에어컨 vs 선풍기


누가 물어보지도 않는데 여름이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다닌다. 나는 에어컨 바람을 싫어한다고.


그게 어떤 바람이냐고 물으면 나는 또다시 설명한다. '그 있어, 인위적으로 차가운 바람.' 그럼 또 이렇게 물어오겠지. 그럼 선풍기는 괜찮아? 그래, 선풍기는 괜찮다.


매미 날개 부딪히는 소리가 귀를 찌르듯 울려대는 여름 대낮에, 혹은 귀뚜라미의 얄미운 울음이 더위를 증폭시키는 것만 같은 찌는 밤에 바닥 위에 깔은 얇은 매트에 누워 선풍기 바람을 쐬는 건 내가 기다리는 여름의 사랑스러운 모습 중 하나이다.  그건 인위적인 바람이 아니냐고 그들은 반박한다. 그럼 나는 내 나름의 논리로 그럴듯하게 설명한다. 적어도 나에게 선풍기 바람은 참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바람이다.


우리 집에는 12년간 에어컨이 없었다. 그땐 아직 쉰을 넘지 않은 엄마가 줄어가는 호르몬으로 새벽에 답답하다며 일어나는 일도 없었고, 낮에 나는 학교 혹은 학원에 있었기 때문에 집은 꽤나 한적했다. 왜소한 세 식구가 조금만 참는다면 선풍기 바람으로도 여름은 무난히 지나갔다. 그렇게 한 해, 한 해를 버티다가 마침내 커다란 에어컨을 들이게 된 건 더 이상 우리가 버틸 수 있는 수준의 더위가 아님을 모두가 동시에 깨닫게 된 어느 해의 여름이었다.


그 해 이후 매년 뉴스에서는 올해야말로 '역대급 폭염'이라며 똑같은 경고를 말만 바꿔 반복했고, 에어컨 구입을 한 해라도 미루자고 고집부리지 않은데 모두가 다행이라 여겼다. 에어컨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력했다. 34도를 웃도는 숨 막히는 더위에 기운이 쪽 빠져서 짜증을 연신 내다가도 집 공기가 차가워지는 데엔 10분이 채 안 걸린다.


그에 반면 선풍기는 이제 보니 힘이 하나도 없다. 더워 죽을 정도의 상태에서 아주 서서히, '덥긴 하지만 죽지는 않을 정도의 괜찮은 상태'로 달려가다가 한참이 지나면 맺혀있던 땀이 겨우 사라지고 이마가 서늘해진다. 애초에 에어컨과 견줄 급이 아니었다. 게다가 삐걱거리며 온갖 부산스러움은 다 떨지만 조금만 시야에서 멀어지면 바람은 닿지도 않는다. 그래서 난 터무니없이 보잘것없는 선풍기가 조금은 안쓰럽다. 해도 해도 너무 강력한 에어컨은 반대로 무서울 지경이다.


온몸으로 버티고 인내했던 더위가 에어컨 바람 앞에서 삽시간에 증발해 버릴 때, 그 강력함에 고새 익숙해져 잠시도 습한 한여름의 공기를 참을 수 없는 나의 바닥난 인내심을 발견했을 때, 그렇게 여름을 버텨가는 자생력을 잃어간다고 느낄 때 나는 에어컨이 무섭다.


고등학교 때 어느 수학 선생님이 소름 돋을 만치 이성적인 모습으로 무지한 학생들의 산통을 깬 적이 있었다. 막 운동장에서 체육 수업을 끝내고 온 10대 청소년들의 아드레날린은 한 대의 에어컨으로도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저마다 책과 파일로 손부채질을 해댔지만, 다음 시간이 되도록 공기를 가득 채운 열기는 식지를 않았다. 팔이 빠져라 부채질을 하는 우리를 보며 수학 선생님은 (누가 이과 선생님 아니랄까 봐) 이렇게 말했다. "너네 에너지 보존 법칙 알지? 어차피 손부채질 백날 해봐야 하나도 안 시원해져. 너희가 손을 흔드는 만큼 다시 열이 나는걸 뭐." 꼭 수학 선생님씩이나 되지 않더라도 잘만 생각하면 누구나 아는 상식이지만, 우리는 그걸 몰랐다. 그걸 몰라서 시원했던 건데. 차마 에어컨도 식히지 못한 그런 더위가 있었고, 그 더위를 이겨보려는 순수하고 어린 무지함도 있었다.


요즘은 여름이 되려 겨울보다 춥다. 지하철에 타도, 카페에 가도 웬 에어컨을 그렇게나 틀어대는지 긴팔이 아니고서는 버틸 수가 없다. 겨울보다도 움츠러드는 여름이다.


나는 선풍기의 빈티지함이 최선책이던 그때가 좋다. 티가 늘어나는 줄도 모르고 선풍기를 옷 안에 넣고 부풀리며 바람을 독차지하던 반항이 좋다. 지금만큼 덥지는 않았지만 그 더위와 싸우는 게 당연하던 일명 ‘강한 자만 살아남던' 시절. 간질간질 자그마한 바람으로 살을 훑고 가는 힘없는 선풍기와 함께하는 내 여름이 내가 기억하는 가장 여름다운 계절이다.


인터넷을 보다 우연히 '에어컨 vs 선풍기'의 설문조사를 찾았다. 다들 나와 비슷한 향수를 품고 있진 않을까 하는 기대로 선풍기를 눌렀지만 에어컨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 이유는 에어컨은 압도적으로 시원해서란다. 나와 같은 선풍기 애착을 지닌 사람도 어디 한 명은 있을 거라고 믿는다.


한 명쯤은 있겠지.






 

매거진의 이전글 nostalgia, 이 단어의 의미를 아시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