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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y joo Apr 02. 2023

영국 할아버지 할머니에게서 배운 삶의 귀여움 - (2)

영국의 한 노부부 에어비엔비에서

이 글은 1편에서 이어집니다.



‘삶은 천천히 감상하고, 느리게 붙잡고, 사소하게 사랑하는 것‘



전날 밤 10시에 잠든 탓인지,

영국 가정집의 난방이 내게는 추웠던 탓인지,

꼭두새벽부터 부지런히 움직이는 이 집안사람들의 소란 때문인지. 알람 없이 아침 7시에 눈이 떠졌다.


그러나 서둘러 일어나지는 않았다. 레스터를 떠나기 직전 워낙 시끄럽고 살인적인 스케줄을 지내야 했기 때문에 오늘은 몸이 저절로 일어나질 때까진 먼저 일어나지 않기로 했다. 게다가 어제 할아버지가 해주신 말씀이 떠올랐다.


"아침은 몇 시에 내려와서 먹으면 될까요?"

"정해진 시간은 없어. 그냥 네가 먹고 싶은 시간에 내려와서 부르기만 하면 돼."


덕분에 한 2시간 선잠을 가진 후에 넉넉히 일어났다. 사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워낙 강해서 눈을 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웃집의 낮은 지붕과 수잔 할머니의 정원 위로 지난 날 내린 영국의 첫눈이 쌓여있었다. 개운한 마음으로 아래층에 내려가니 할아버지는 아들인 샘 아저씨랑 열띤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고, 나는 소파에 조용히 앉아 놓여있던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책을 있었다. 영국인들, 특히 연세가 지긋한 사람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을 정말로 사랑한다. 그때 할아버지가 방에서 나오셨고 특유의 '오!' 하는 짧은 감탄사를 내뱉으시고는 주방으로 나를 이끄셨다. (아, 참. 수잔 할머니는 친구분 장례식장에 가시느라 이른 아침 떠나셨고 내가 떠나기 전에 돌아오지 않으셨다)



"Choose any cereal you want."

"이 곡물 시리얼로 할게요!"

"Brown or White?"

"통밀빵이요!"

"Coffee or tea?"

"A CUP OF TEA WITH JUST MILK PLEASE"



할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조용히 신문을 보시고 나는 내 아침 식사에 집중했다. 식사가 끝나갈 즈음 내 옆으로 오신 링턴은 내 일정에 대해 물어보셨다. 내셔널 갤러리에 잠시 다녀올 거라 하니 조그만 유니온잭 냅킨에 할아버지의 전화번호를 적어주셨다.






한 시간 기차를 타고 런던 시내로 들어가는 길. 지금까지는 런던에 갈 때면 레스터에서부터 3시간 동안 코치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반면 출근하는 직장인들과 같이 런던의 중심지로 들어가는 기분은 참 묘했다. 여러 번 봤던 런던의 랜드마크들이었지만, 완전히 익숙하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낯설지도 않았다. 창 밖만을 뚫어져라 보며 어느새 내셔널 갤러리가 있는 트라팔가 광장에 다다랐다.







오후 5시, 돌아가는 길은 마치 학교에 갔다 퇴근 시간에 맞추어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벌써 익숙해져 버린 길로 쭉 되돌아가니 어느새 집 앞이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런던에서의 하루는 어땠니?"


할아버지가 반갑게 맞아주셨다.


할아버지의 질문에 신나서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꺼내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반대로 할아버지의 하루를 여쭈니 역시 만만치 않게 알찬 하루를 보내고 계셨다. 수잔 할머니를 대신해 정원을 정리하고, 잠시 시내에 나가 쇼핑을 했으며, 벌써 저녁까지 드셨다고 한다. (사실 할아버지랑 저녁 식사를 함께하러 일찍 들어온 거였는데 이 말을 듣고 나도 저녁을 먹었다고 거짓말해 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할아버지와 소파에 앉아 BBC뉴스를 봤다. 오늘도 역시 할아버지가 직접 우려주신 티 한잔과 함께. 중간중간 재생을 멈추며 할아버지는 한두 마디의 말을 덧붙히셨다. 이를테면 영국의 한 경찰이 연쇄 살인마였다는 충격적인 뉴스가 나왔을 때는 '원래 영국의 경찰은 저렇지 않아. 오해하지 마렴' 이라던가.



뉴스가 끝나고는 서둘러 할아버지를 붙잡고 미술관에서 사 온 작은 선물을 건네드렸다. 고흐의 해바라기가 그려진 아주 보잘것없는 책갈피였다. 별거 아닌 저렴한 선물이었지만 할아버지는 실제 고흐의 그림을 보듯 이리저리 만져보며 고마워하셨다. 그렇게 어젯밤처럼 할아버지와 나는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다음 날은 새로운 숙소로 떠나야 하는 날이었으므로 아주 일찍 일어나 할아버지의 방문을 두드렸다. 할아버진 아침 일찍이부터 컴퓨터로 무언가를 작업하고 계셨다. 오늘도 정확히 어제와 같은 아침 식사였다. 아참, 시리얼 종류는 바뀌었다. 소파에 앉아 조용히 내 식사를 기다리던 할아버지는 슬금슬금 식탁으로 걸어오더니 A4용지로 프린트한 지도 한 장을 건네주셨다.



"오늘 빅토리아 역에 간다고 했지?"



사실 다음 숙소에 가기 위한 방법은 전날 구글맵을 통해 이미 다 찾아놓은 후였다. 그렇지만 할아버지는 무작정 내가 런던 시내를 헤맬 거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암호 같은 지도 위의 구불구불한 길 위로 친절하게 역에 가는 방법을 그려 주셨다. 비록 이후에 그 지도를 살피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 지도 덕에 마냥 크고 낯설던 런던이 내 머릿속에서 더 자그마해진 건 분명하다.


그렇게 아침 식사를 끝내고 부지런히 짐을 싼 후에 나갈 채비를 마쳤다. 문득 방을 나오기 전 할아버지, 할머니께 감사인사를 남기고 싶어졌다. 그렇게 개어놓은 수건 위에 작은 쪽지를 남기고 무거운 짐을 끌어 할아버지의 배웅을 받아 문 밖으로 나왔다.



매일 다른 손님을 받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기억 속에 내가 언제까지나 남아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내 기억에 이 집은 아주 짙게 남아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 집에 다시 돌아올 수 없으리란 것도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할아버지를 포옹해 드렸다. 그리고 "See you later!" 어느 때보다 진심인 이 말로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Oh! okay. See you later." 예상치 못한 당돌한 인사에 할아버지도 같은 인사로 담백하게 나를 보내주셨다.






정이 들기에는 지나치게 짧은 시간. 할아버지, 할머니와 특별한 걸 하지는 않았다. 아주 인상 깊을 정도로 많은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무한한 행복과 절대 잃고 싶지 않은 평온함을 느꼈다. 짜릿한 경험, 아름다운 볼거리, 여행의 일탈. 이 모든 것들은 찰나의 행복과 기쁨을 주지만 그런 종류의 행복은 사실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오히려 정말 오래 기억되고 지속되는 행복은 내가 아주 느긋한 마음으로 순간을 만끽하고 음미했던 때에 느껴진다.


이 집은 내 존재만으로 순간을 만끽하기에 아주 적절한 곳이었다. 우선 남같지 않게 편안한 수잔, 링턴이 있었다. 당시에 나에게는 딱 할아버지와 할머니 같은 타인이 필요했다. 혼자 있을 수 있게 내버려 두되 곳곳에 따뜻한 관심을 두어 절대 외로움을 느끼지는 않게 살펴 주시던 그분들의 다정함이 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취향으로 가득한 사랑스러운 집과 방이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오랜 세월 좋아했을 물건과 이야기로 채워진 그 집에 있으면 마치 동화 속에 있는 것처럼 행복했다. 눈 둘 곳이 많은 방에 있으니 좋은 생각과 마음으로만 채워졌다.


무엇보다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점이 가장 컸다. 교환학생 자체로도 꿈같은 현실인데, 그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고, 아무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되는 더 꿈같은 이틀이 내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니 나는 흘러가는 대로 생각을 해도 됐고, 하고 싶은 모든 것들을 천천히 음미할 여유가 있었다. 평소 어쩌다 한번 휴가가 주어지면 침대에 몸을 누이고 종일 핸드폰만 들여다보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곳에선 핸드폰 따위에 집중할 시간이 없었다. 하고 싶은 것 투성이었다. 천천히 책을 읽고, 미술관을 거닐고, 음악을 들으며 창밖을 바라보고, 일기를 쓰고. 오직 나의 존재만으로 소화할 수 있는 활동들에 집중하니 특별한 것 없이도 마음이 충만해졌다. 하루가 충만해졌다. 내 삶이 이토록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이때만큼 정점에 다다른 행복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모든 요소와 조건이 가장 적절하게 맞아떨어진 저때의 행복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래서 이때의 행복을 진짜 내 삶으로 끌어 오고자 작은 규칙을 세웠다.


1. 내 마음의 공간을 가질 것.
 - 내 생각과 감정을 정리한 일기를 짧게라도 꾸준히 쓸 것. 카페에 가거나 전시회에 가는 등 혼자 느끼고 사색할 시간을 많이 가질 것.
2. 내 공간을 가질 것.
 - 내 방, 넓게는 내 집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과감하게 꾸밀 것. LP, 음악, 영화, 책, 영국 등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아낌없이 모으고 내 방에 채워나갈 것. 조화를 생각하고 방을 꾸미기보다 일단 모아놓고 조화를 생각할 것.
3. 전혀 실용적이지 않고 단지 재밌고 예쁜 것을 할 것.
 - 무언가를 할 때 쓸모나, 실용성에 대해서만 생각하면 오늘 내 존재는 생산적인 소모품으로 끝나고 맒. 정원 가꾸기, 피아노 치기, 소설 읽기, 예쁜 찻잔에 차 마시기 등. 한가롭고 쓸데없는 취미의 시간을 반드시 향유할 것.  
4. 반복적인 일상에 눈을 뜰 것.
 - 우리의 삶은 작은 루틴의 반복으로 이루어짐. 매일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들에 온 감각을 기울이고 즐거움을 찾아 나갈 것.


삶을 사랑스럽게 만드는 건 별 게 아니었다. 자극적인 도파민 같은 순간에만 행복함을 찾을 필요는 없다. 천천히 감상하고, 느리게 붙잡고, 사소하게 사랑할 때 삶은 더더욱 사랑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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