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전수전 공중전, 직장인 n년차 딸 맘 이야기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이야기는 십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시작할 수 있을 것 만 같다.
시간을 되돌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새삼 내 나이가 실감이 난다. 어느새 30 중반이 되어 두 살 딸아이의 엄마가 되어있다. 믿기지 않는 전개에 내 자신도 당황한다.
어쨋튼, 10년 전 내 나이 스물 넷, 대학교 졸업 직전 한국의 중소기업에서 삼개월짜리 인턴을 시작했다. 나의 꿈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언제나 광고 대행사에 들어가는 것으로, 한창 취업난이 심각했을 2012-2013년 나는 대기업 홍보팀 사원 자리를 거절하고 중소기업 광고대행사의 AE로 소위 말하는 '커리어' 여정을 시작했다.
당시에 주위 모든 지인 및 부모님은 그를 두고 미친 결정이라며 결사 반대했지만, 자유 영혼으로 삶을 살아오던 나에게 꿈은 포기할 수 없는 원동력 같은 거였다. 그렇게 해서 입사 첫날, 청바지를 입고 갔다가 영혼이 털릴 정도로 상사에게 혼나고 나의 꿈은 현실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거였다는 것을 바로 깨닫는다. 칸 광고제 수상작을 보면서 꿈을 키워왔는데 칸은 왠말, 나의 신세는 청바지 입고 첫 출근날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펑펑 우는, 그냥 그렇고 그런 대학교 4학년이었다.
영어 프레젠테이션까지 하고 들어간 인턴이건만, 대표가 나의 학교 선배라 믿고 들어간 자리이건만, 커피 타고 화장실 휴지 갈고, 음식 쓰레기 치우고, 거의 모든 음식 주문의 마스터가 되어가는 것은 물론 앉은 자리에서 아이디어 열개 내기, 경쟁 피티에 동원되어서 아침 8시 출근 새벽 3시 퇴근하기 등 거의 사회 생활의 끝판왕을 나는 첫 스타트에 경험했던 거 같다. 거기에 사사 건건 시비거는 여자 상사는 무섭기 그지 없었고.
뭐 암튼 우여곡절 삼개월이 지나고 그쪽에서 정직원 오퍼를 받았다. 그 때 당시 졸업 유보 상태였지만 나는 고민 없이 '헬, 노'를 외쳤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안녕히 계세요..차라리 농사를..총총' 하며 그날로 집을 싸서 부모님이 계신 시골로 낙향해 버렸다. 정말 마음 한 구석에는 농사라는 키워드가 있었고 사회와 이별하기로 작정한 상태였지만, 한 달 방에만 은둔하다 보니 스멀스멀 열정이라는 것이 또 자라나더라.
졸업을 바로 앞두고 나는 패기있게 3군데만 이력서를 쓰기로 했다. S*의 C*, H*의 I* 그리고 애플광고 만든 다던 T*. 지원하면서도 생각했다. 이것은 농사를 더 잘 짓기 위한 자양분, 그러니까 실패의 자양분(?) 뭐 그런게 될 거라고. 그런데 붙었다. 그것도 가장 크고 좋은 곳. 엄마와 아빠가 매우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나도 물론 신나서 방방 뛰었다. 그리고 솔직히 내 험난한 인턴 생활에 비교하면, 소위 말하는 한국 대기업 생활은...(솔직하게) 할만 했다고 말 할 수 밖에 없다. 혹시 연봉이 궁금했다면 내 기억으로 중소기업 시절 그 회사 터줏대감 차장님 연봉이나 대기업 초봉이 다르지 않았다고 기억 된다. 그러니 이해가 간다. 한국에서 왜 대기업 대기업 할 수 밖에 없는지.
5년간의 국내/글로벌 광고팀에서 즐겁게 일한 기억도 잠시, 상황이 야속해 신랑을 따라 미국에 가야했다. 남들이야 오-미국? 할 수 도 있겠고 나 자신도 그 때는 그랬다. 뭐, 다른 나라들도 살아봤는데 미국이야 별거 있나? 출장도 종종 다녔었고, 뭐- 화목한 가정을 잘 꾸리고 살다보면 꼭 일하지 않아도 괜찮겠지-라는 생각조차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나의 생각은 가.차.없.이. 틀렸다. 아주 많이 외로웠고, 오갈데가 없었고, 물가는 비쌌고, 나는 하루 아침에 백수가 되어서 신분을 잃은 행색이 되었다. 제일 싫어하는 질문이 오늘 뭐했냐는 질문 혹은 너는 뭐하냐는 질문, 아주 외향적인 성격덕에 그나마 살아남았지만 처음 영주권 기다리는 일년여간의 시간은 아주...고통을 감내하는 여정이었다.
드디어 영주권, 취업의 문턱에 서고자 그나마 알고있던 MBA커넥션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려본다. 미국 이력서를 어떻게 쓰는지 연습도 해보고, 하루종일 리서치도 해보면서 한인 커뮤니티에 이것저것 질문도 해보았다. 그러나 그때마다 돌아오는 답변은 부정적. 이것에 대해 굉장히 할말이 많은데, 남이 코멘트하는 부정적 의견에 절대 자신의 능력과 자질을 의심하지 말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처음 대기업 거절하고 중소기업 인턴 했을 때도 사람들은 나에게 미쳤다고 했고, 내가 나의 스펙으로 대행사 3사를 갈수 있을까요 라는 질문에 커뮤니티 구루들은 안된다고 했으며, 미국에서 처음으로 취업을 준비할 때도 여기 사람들은 안될거라고 했다.
안되면 되게 하라는 말은 괜히 있는 말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 중소도시에 중소기업에 랜딩하게 된다. 그 도시에는 애초부터 빅 네임 에이전시가 없었던 결과로, 로컬 에이전시중에 상위 다섯개 기업에 들어가는게 처음 목표였고, 그 목표는 이루었다. 물론 거기서 혼자 아시안, 혼자 코리안이었고 마지막으로 그 에이전시가 아시안을 고용했던 건 빌딩 청소부 빼고는 내가 처음이었던 듯 하다. 삼성보다 연봉도 많이 받아갔고, 엄청 작은 도시다 보니 서울보다 물가 싼 경우도 많아서 학생이었던 남편을 부양하고 살만 했으며, 그 와중에 임신도 했다. 엄청난 문화 차이라고 느꼈던 '나는 에이전시지만 클라이언트인 네게 no를 외쳐' '나는 오늘 퇴근시간이 다 됬으니 내일 얘기하자' 라는 등등의 칼퇴 문화, 수평적 문화에 끌리긴 했지만 단 하나 부족한 것..그것은 바로 프로젝트의 규모였다. 스케일이 부족했다고 해야하나..
한국 주니어 시절때도 연간 몇 밀리언을 굴리다가, 여기와서 최대 클라이언트가 원 밀리언 조금 넘을 때..크리에이티브 팀은 할 수 있는 것 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다. 적어도 나는 재미가 없었다. 그때 마침 또 남편따라 이주를 준비해야 했고, 이제 미국에서 나름 큰 도시에 랜딩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 때 아이가 태어났고 나는 정신없이 아이를 키우면서도 미국에서 큰 프로젝트, 큰 회사와 일할 수 있는 기회가 궁금했다. 딸을 가져서 더 그런지, 여기서 내가 포기하면, 아이에게 본보기가 되지 못할 거라는 마음이 컸다. 아무 커넥션 없이 멘땅에 늘 헤딩하던 성격은 절대 어디 안간다.
결국 아이가 한살 조금 넘었을 때 최대 글로벌 네트워크인 W**중 미국 십대 대행사인 W*에 조인했다. 지금도 일하고 있고, 허심탄회하게 말하자면 물론 연봉도 이제는 일억이 넘는다. 여기는 미국 중 큰 도시이기는 하지만 물가가 매우 낮은 주로, 그정도 돈이 아직은 의미를 가지는 주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은 너무 재미있고 소속감에서 오는 프라이드, 대형 협력사나 대형 기업과 일하는 신기함 모든게 아주 좋은 조합이라고 감히 평가해 본다. 물론 미국 중소기업과 다른 점은 워낙 클라이언트의 크기와 예산이 커지다보니 여기서는 클라이언트에게 no는 잘 하지 않는다. 야근은 있을 때도 있지만 정말 간헐적으로, 없다고 봐야한다. 아주 좋은 칼퇴 문화. 한국에 도입이 시급하다.
짧고 간략하게 지난 약 십년간 (십년은 채 안되었다) 나의 여정을 한 번 기록해 본다. 누군가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이 글이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퇴근 시간이니 짧게 줄인다..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