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교대생, 임용고시 대신 마케팅 인턴을 선택하다
찬 바람이 부는 1월. 백구 (임용강의)의 개강이 3일 남았다. 그리고 나는, 백구 결제 대신 서울행 ktx 표를 결제했다. 취업계도 쓸 수 없고 산학연계도 되지 않는 학교에서 나는 반년을 과감히 포기했다. 이 선택으로 나는 코스모스 졸업을 하게 되었고, 졸업 전시회는 후배들과 함께 하게 되었다. 건강이나 기타 일신의 사유가 아닌 이상, 휴학을 찾아보기 힘든 학교에서 나는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기록은 미래의 나에게 과거의 내 선택을 납득시키는 일이므로, 지금의 이유를 기록해보고자 한다.
0. 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완전한 내 불찰이다. 나는 내가 안정지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첫 대학에 들어가기 전 고등학교 3년 동안 법조인이 되고 싶었다. 부푼 꿈을 안고 처음 들어간 강의실에서 내 환상은 완전히 무너졌다. 인간이 인간을 증오하는 마음으로 죽이고, 돈을 갖기 위해 누군가의 희망과 공포를 자극해 사기를 치는 판례는 차고 넘쳤다. 삶은 저주라는 말보다는, 사랑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문장에 기대어 사는 나로서 이런 사건을 평생 볼 자신이 없었다. 성범죄 관련 판례라도 보는 날엔 분해서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심장이 필요하지만 나는 불타는 마음밖에 없었다. 소설 하나를 읽으면서도 과몰입해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나에게 이 일은 아니었구나. 그땐 정말 내 모든 것이 송두리째 뽑혀 나가는 기분이었다. 다른 길을 찾아야만 했다. 나를 다시 찬찬히 돌아봤다. 왜 법조인을 꿈꿨더라. 나는 나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타인의 삶에 영향력을 미치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었다. 가능하면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시기에. 여러 번의 과외와 교육 봉사 활동을 하며 학생들을 만나는 일이 어렵지 않겠다는 판단이 섰다. 자의식이 형성되고 평생의 가치관이 결정될 수 있는 초등학생 시절 내가 만나는 아이들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불확실함에서 벗어나, '자격증'으로 보장받는 확실함을 즐기고 싶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꿈이 사라진 스무 살에게 들이닥친 공허함과 두려움이 생각보다 컸던 것 같다.
1. 여러 경험 속에서 새로 발견한 나의 모습
교사의 세상이 곧 아이들의 세상이라는 말이 있다. 기왕 교사가 되기로 한 거, 한국 교육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직업인이 되고 싶었다. 교내 수업 실연 대회나 지도안 공모전에 적극적으로 나갔고, 상도 꽤 받았다. 지속가능발전교육(ESD)에 꽂혀 하루종일 SDGs 만 생각하던 날도 있었다. 지속가능발전목표와 교육에 관해 자료를 찾다가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이하 한위)에서 발간한 단행본을 읽게 되었다. 아젠다와 방향을 제시하고, 담론의 장을 만드는 한위의 활동에 크게 공감했고, 나는 '찐팬'이 되었다. 대학생 신분으로 한위에서 활동할 수 있는 방법은 인턴 또는 청년기자단이었다. 이거다! 가슴이 다시 조금씩 뛰는 게 느껴졌다. 그때부터 나는 적극적으로 '대시'했다. 이벤트에도 참여하고, 한위에서 여는 모든 콘퍼런스에 참여했다.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자주 태그 하기도 했다. 포트폴리오에는 이런 '찐 사랑'을 녹여냈다. 영어도 잘해야 할 것 같아서 토익 시험도 봤다. (아주 급하게.. 이렇게 딴 토익 성적은 각종 대외활동과 인턴 지원에까지 쓰인다.) 이런 사랑이 통해서일까? 그다음 해인 2022년, 한위 기자단 4명 중 한 명이 되었다!
2. 마법의 주문, Connecting the dots
기자단이 되어서는 정말 열심히 했다. 하고 싶은 활동을 최대한 보장해주셔서 적극적으로 아이템을 제안하고 실현해보기도 하고, 포럼과 콘퍼런스 같은 큰 행사에 현장 취재도 나가고, 트렌드 리포트 PT도 해보고, 콘텐츠 제작도 마음껏 해볼 수 있었다.
활동하면서 '되고 싶은 나'의 가짓수는 계속 늘어났다. 졸업 후 교육학 공부를 더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 유관기구에 들어가 일하고 싶기도 했다. 교육이 누군가에게 기회이자 가능성이 되기도 한다는 점에 반해, 교육개발협력에도 관심이 생겼고,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마케터가 되고 싶기도 했다. 이 모든 가능성과 방향에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내가 선택한 건, 뭐든 하나씩 다 해보는 거였다.
교육이 누군가의 삶에 기회이자 가능성이 된다는 희망이 좋았다. 개발협력 분야에 들어가고 싶어 ODA 자격증을 땄다. 각종 교육을 들으며, 개발협력의 필요성을 느꼈다. 실제로, 해외사무소 재외공관 YP에 지원해서 1차에 합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면접에 가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나약한 몸과 체력 때문이었다. 나는 뉴욕, 도쿄와 같은 대도시에서도 물갈이를 징하게 한 경력(?)이 있다. 일주일 여행을 가면 일단 이틀은 아프느라 시간을 보낸다. 잔병치레는 기본이고, 스트레스와 불안은 시시때때로 몸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현지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한 체력과 정신력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약 1년의 시간을 타지에서 건강하게 살 수 있을까? 지금의 나약한 몸 상태로는 자신이 없었다. 또, 프로젝트 계획 및 실행보다 행정 업무가 중요한 만큼, 직무 적합성에도 자신이 없었다. 한국에서 회계나 행정 관련 업무를 경험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직무에 낯선 환경, 부족한 체력이 합쳐지면 ... ... 한국에서의 직무 경험과 확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한국에 남기로 결정했다. 교육의 변혁과 미래를 고민하는 곳에서 대외활동을 하며, '학자'인 내 미래를 얼핏 상상해볼 수도 있었다. 변태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공부가 좋다. 새로 배우는 건 늘 재미있다. 전문가분들이 말씀하시는 대로 공존과 연대를 위한 교육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했다. 나아가야 할 선명한 방향과 반대로 가는 세상 속에서 공존과 연대의 단어는 너무도 미약해 보였다. 평가와 그에 대한 보상의 공정성을 교육의 쟁점으로 꺼내는 지금이 안타깝기도 했다.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세상에서 이 많은 담론과 제안이 힘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전히 궁금하다. 공부를 더 한다고 해서 내가 뾰족한 방법을 제시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명확한 교육의 미래에 새로운 아젠다를 꺼내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마지막 남은 콘텐츠 제작. 지금 보면 구리기만 한 카드뉴스를 만들기 위해 첫 주에는 이틀을 매달렸다. 처음에는 망고보드의 힘을 빌리기만 했다면, 가면 갈수록 욕심이 생겨 스스로 디자인을 만들기도 했다. 릴스 기획, 촬영, 그리고 편집까지 총괄하며 콘텐츠를 기획하고 실제로 만들어 반응을 이끌어 내는 일이 흥미로웠다. 시각적으로 구현해내는 일보다는 전체적인 시리즈나 컨셉을 구상하는 일이 더 재미있었다. 일의 재미는 잘하는 것에서 온다는 말을 맹신한다. 거기에다, 나는 약간의 '관종'끼가 있다. 업로드 후에 매일 라이크 수를 확인할 만큼, 좋은 정보를 전달하고 라이크를 받는 일에 흥미를 느꼈다. 하루종일 '슥뽕' (새로고침) 을 멈출 수 없었다. 거기에다 트렌드리포트를 매달 만들면서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재미를 주는 동시에 마케팅을 잘 녹여낸 사례들이 흥미로웠다. 특히 ESG, CSR 사례를 많이 접했는데, 이 분야는 아직도 나에게 더 알고 싶은 분야다. 아마 올해 더 많이 공부하게 되지 않을까?
아무튼 나는 마케팅 분야와 한 발 짝 더 가까워졌다. 하나, 좋아하는 기관의 소식을 계속 이야기할 수 있고, 둘, 나의 제작물이 명확한 수치로 제시되며, 셋, '좋아하는' 것을 계속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 마지막으로 새로운 트렌드를 따라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스물셋을 한 달 남겨두고 결심했다. 내가 사랑하고, 세상을 이롭게 만드는 서비스와 제품을 만드는 곳에서 본격적으로 마케팅을 경험해 보자!
3. 일 년 내내 한 고민, '정년을 채울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는 동안, 두 번의 교생실습이 진행되었다. 교생실습은 혼란을 더 가중시켰다. 왜냐하면 ... 아이들이 너무 예뻤기 때문이다! 각자의 세계에서 나이에 맞는 고군분투를 하는 어린이들을 만나는 일이 좋았다. 저학년이 가진 에너지를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우려가 민망할 정도로 나는 너무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성실하게 자라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이 아이들이 조금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모종의 책임감도 느꼈다. 차라리 어린이들과 생활하는 게 '싫었다면', 다른 방향으로 가는 데에 더 주저하지 않았을 텐데 나는 이 일도 재미있었다.
그럼 왜 다른 길로 가기로 한 걸까.. 아래는 초등교사를 꿈꾸는 학생들도 꼭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다.
먼저, 나는 그렇게 큰 인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초등교사는 일 년에 걸쳐 꾸준함을 가지고 일관적으로 학생을 지도해야 한다. 내가 아무리 좋은 교사라고 하더라도, 결국 변화의 주체는 어린이다. 내면의 변화는 한참 후에야 드러나는 경우도 많다. 나는 객관적인 수치와 결과물이 큰 동기부여가 되는 사람인데, 과연 내가 이 일을 지금부터 40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초등교사는 같은 말을 수백 번 반복해야 하는 직업이다. 내가 멋진 1학년 어린이들을 만날 수 있었던 건, 담임선생님께서 학기 초에 아이들을 열심히 지도해주셨기 때문이다. 한 줄은 이렇게 만드는 거예요, 책상 서랍은 이렇게 정리하는 거예요, 학교에 오면 선생님께 인사해요, 화장실을 사용한 후에는 반드시 물을 내려야 해요 등등 생활 규칙을 지도하기 위해 아마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백 번은 넘게 하셨을 것이다. 이것도 자신이 없었다. 지금 이 마음으로 섣불리 교직에 들어서더라도, 정년을 채우지 못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62세까지 고용안정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건, 정년을 내가 채울 때나 가능한 일이다.
두 번째는, '초등'의 특성이기도 한데, 초등학생은 지식전달도 중요하지만, 학생 그리고 학부모와의 관계 형성이 매우 중요하다. 관계 형성과 갈등 해결, 그리고 중재자는 교사의 주요한 역할인데 나는 내가 그런 역할과는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명확한 이슈가 있고 이를 수정하여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차라리 어렵지 않다. 내 잘못이면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갈등 중재는 그렇지 않다. 내가 아닌 제삼자인 학생들의 갈등과 관계에 개입하고 중재해야 한다. 이를 위해 충분한 신뢰를 쌓는 것은 물론이다. 나는 자신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꿈을 꾸고 도전하라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내가 그렇게 살지 않았는데, 아이들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기만이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선택지를 하나씩 지워가며, 나와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결정하는 사람인지를 면밀히 살펴볼 수 있었다. 나 아직 어린데, 내가 하고 싶은 거 좀 더 해봐도 되는 거잖아! 작년에는 공공성과 공익을 중심으로 하는 기관에서 올해는 사기업 위주의 활동을 하게 될 것 같다.
다음은, 내 목표를 어떻게 현실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할 수 있는 경험을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해 본 후, 나에게 가장 맞는 일을 업으로 삼고 싶다.
새해에는 부지런히 브런치에 쓰는 사람이 되고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