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운동회 - 만국기와 개선문
중국에서는 도로변에 만국기가 펄럭이면 그곳은 주유소라는 뜻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도 만국기를 보면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손꼽아 기다리던 가을운동회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어서다.
운동회 하루를 하려고 1년간 학교 다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게 어느 시절 이야기더냐, 벌써 반백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어쩌면 희미할 것 같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지만 이것만은 또렷하다.
그러니 이 나이에도 즉시 재생할 수 있는 CD와도 같은 기록이다.
우리의 꿈과 희망이 영글던 그 시절 그 운동장에서의 열정이기에.
파란 가을 하늘에 펄럭이는 만국기! 그리고 임시로 설치한 개선문!
‘영차! 영차!’ 외치며 그 개선문을 당당하게 통과하던 어린 용사들!
청백이 한판 붙고는 승자든 패자든 다 같이 개선문으로 퇴장한다.
승자만이 누리는 개선문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가 승자인 셈이다.
유럽 여행 중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개선문을 오른 적이 있다.
무슨 전쟁 기념이며 나폴레옹이 어쩌고 하는 글귀에는 관심도 없다.
예술적 가치나 역사적 의미보다 ‘개선문’이라는 명칭에 흥분한다.
내게는 각목으로 엉성하게 세운 그 운동회 ‘개선문’이 더 훌륭하다.
학년별 청백 대결이나 동학년이 같이 준비한 프로그램을 선보일 때,
모두가 개선문을 통과하며 설레는 기분을 만끽하니 얼마나 좋은가?
개학 후 바로 운동회 연습을 시작하여 저학년은 귀여운 율동에,
오자미를 던져서 바구니가 터지면 흘러내리는 [무찌르자 공산당!]
고학년 남자들은 장대 높이기, 기마전, 뜀틀묘기, 차전놀이.
여자들은 단체줄넘기, 소고, 행진, 무용, 부채춤 등이다.
양념으로 할아버지들의 대형 공굴리기나 엄마들의 50미터 달리기.
우리들은 진행되는 프로그램마다 200%의 에너지를 투입한다.
온종일 무슨 체력으로 버텼나 싶지만, 이보다 신났던 놀이는 없다.
졸업생 모두가 그런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기에,
어린 시절의 흥분과 함성이 만국기와 개선문에 젖어 있기에,
시골 초등학교 총동문회에는 어느 행사보다 많이 참석한다.
많은 학생이 도시락을 못 챙겨 왔다. 그만큼 가난했던 시절이다.
점심시간에 슬며시 나와 마중물 넣고 퍼 올리던 펌프로 물배 채우고
5교시부터 전교생이 모여 중노동에 가까운 운동회 연습을 한다.
늦여름 따가운 뙤약볕 아래서 선캡도 없고 선크림도 없이 매일 선텐이다.
죽어라 연습해서 대개 추석 전날쯤이 가을운동회 그날.
총연습 날은 당연히 운동회 바로 전날이다.
하늘에 먹구름이 끼고 흐려서 비라도 내릴 것 같으면
비 오면 안 된다고 나는 믿지도 않는 하느님께 빌고 또 빌었다.
당시의 유언비어로 어느 초등학교는 운동장 닦을 때,
큰 이무기가 나와서 일하던 인부들이 삽으로 죽였는데,
죽은 이무기가 심술을 부려서 그 학교는 행사 때마다 비가 온다고,
우리 학교는 그런 일 없으니까, 내일은 해가 뜰 거라며 잠들었다.
1년에 3번 받는 용돈 - 설, 소풍, 운동회.
그렇게 받는 용돈 몇 푼으로 무엇을 사 먹을까,
크라운산도? 쫀듸기? 라면땅? 화란 나르당의 천연향 칠성사이다?
아니면 장난감을 살까? 짐 자전거 아이스께끼 통도 눈에 삼삼하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가을운동회 그날!
학교 근처의 송방(호서지방의 [상점]라는 방언)에서 산 체육복을 입고,
말이 체육복이지 검정고무줄 넣은 나이론 홑겹이다. 그래도 신났다.
머리에 동여매는 청백띠. 학급 번호 홀수가 청군, 짝수가 백군이다.
두 줄로 서서 제자리 뛰기를 하면서 ‘영차! 영차!’를 외친다.
개선문을 사이에 두고 청백으로 나뉘어 응원전도 신나게 펼친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가을하늘엔 온종일 만국기가 펄럭인다.
태극기와 성조기, 스위스 국기, 영국의 유니언잭이 많이 나부꼈다.
좌청룡 우백호라 왼편이 청군, 오른편이 백군.
응원 깃발을 흔들면서 외치는 선배의 선창을 따라 목청껏 외친다.
“우리가 잘한다!/잘한다, 백군!/이겼다, 백군!”
“제비같이 날고/범같이 싸워서/오늘의 승리는/청군이 거두자!”
가을운동회는 우리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동네잔치다.
추수철이지만 이날만큼은 모두가 일손을 놓고 운동장으로 모여든다.
오후엔 술에 취한 동네 주정뱅이 아저씨도 어김없이 등장하는데,
술주정 소란은 운동회라는 거대한 물결에 쉽게 묻히고 만다.
즐거운 점심시간! 옹기종기 모여 엄마표 찬합을 펼쳐놓는다.
뭘 먹어도 꿀맛이다. 찐 밤에, 소금으로 우린 땡감에, 풋사과에.
단무지와 소시지로 모양낸 김밥이 아니고 밥 한술 떠서 꾹꾹 누른,
하지만 솎음배추 겉절이를 얹어서 한입 먹으면 왕자도 부럽지 않다.
오후가 더욱 신났고 운동회 후에도 후일담이 많은 경기를 했다.
사내들의 호전적인 경기로, 호각 소리에 맞춰 왕말이 뒤로 빠지고,
호위말이 뒤따르고, 이어서 평야를 달리듯 나가서 한판 붙고,
다시 호각을 불면 상대방에게 다가가 왕말을 눕혀야 이기는 기마전!
남자 고학년 텀블링은 절도있게 2인 1조 물구나무서기로 시작해서
운동장 중앙에 인간 피라미드 4층탑을 완성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4층 어린이가 일어나서 양팔을 벌리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낸다.
어느 학교는 1층 8명이 엎드렸다고 해서 3층 탑이라고 개무시했다.
부락별 청년 800m 릴레이는 그야말로 흥분의 도가니!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였고 잘 아는 옆집 청년이 선수이고,
마을 단위끼리 경쟁심이 고조에 달했던 시절이니 오죽하랴.
이 계주는 운동회 후 한동안 온 동네의 화젯거리로 입에 오른다.
우리들의 가을운동회 하이라이트는 역시 남녀 혼성 청백 계주.
호루라기와는 차원이 다른 화약 냄새 진동하는 출발총성이 울린다.
주자들 간의 거리가 좁혀질 때, 앞지를 때의 함성을 기억하는가?
가을운동회는 육성회장님의 만세삼창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우리들은 하루 종일 졌어도 이긴 경기를 했으니 무조건 신났다.
삶이 고단했던 시절에 부모님과 함께했으니 더욱 신이 난 거다.
너 나 할 것 없이 가을운동회가 남긴 여운이 얼마나 길었던가?
모든 이의 가슴속에 남은 영원히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이다.
학용품이 귀하던 시절에, 우리들은 모두가 상품을 받았다.
월계관 마크가 찍힌 노트 몇 권과 연필 몇 자루 받아 들고,
더 놀고 싶어 집에 가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우리들의 축제!
초대 가수 축하공연 없이도 이렇게 신났던 행사 있으면 나와 봐!
(2008.06. 2019.10. 보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