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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애라 May 31. 2024

자살하고 있는 한국, 지나치게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

살고 쓰다

남편이 소방관이다 보니 원치 않게 통계수치를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바로 한국 자살률에 대한 것이다. (참고자료: 하단 표기)


사람들은 통계 수치가 자기 앞의 구체적 개인으로 실증될 때까지 잘 믿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뉴스나 보도를 통해 나타나지 않는 사례들을 접하며 통계가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최근년도 OECD 회원국 자살현황 : 이렇게 두 배 이상 차이가 나 버리면 통계상의 오류(취합 방식의 허점이나 알아내지 못한 사례 등)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남편이 소방관으로 일하기 시작한 것은 2005~2006년 무렵이니(내 일이 아니라 정확히는 모르겠다.), 거의 20년을 그 업에 몸담고 있는 셈이다. 지금껏 관찰한 결과, 남편이 업무로 스트레스를 받던 사건들은 의외로 화마와 싸운 일은 아니었다. 화재가 아무리 크더라도 말이다. 아마도 이 업에 종사하려 마음을 먹었을 때 각오한 일이라서 그런 것 같았다. 비교적 덤덤했다. 그러나 '자살'이나 흔히들 '동반 자살'이라고 하는 '살해 후 자살' 사건들을 접한 후에는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가까운 증상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그 증상도 거의 없어졌다.


우리 부부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장(친정)에서 신혼을 시작했는데, 내 고장에서 그렇게 많은 자살이 일어나는 줄은 남편이 말해 주어서 알게 되었다. 아마 소방관인 남편이 없었다면 대부분의 사례를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사례들은 다양했다. 집에서 목을 매달고, 강에 뛰어들고, 농약을 마시고, 실종되었다가 찾으니 소주병과 함께 숲에서 변사체로 발견되고(자살로 의심된다.), 사건들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일어났다. 10년 전만 해도 그런 사건을 접하고 나면 집에 와서 이야기를 해주곤 했는데, 요즘은 잘 그러지도 않는다. 나 역시도 남편이 전해주는 사건을 듣고 놀라거나 심리적 타격을 입지 않는다. 그저 약간 서글퍼진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왜 이 모양이 되었을까, 그런 생각에 잠긴다.


코로나19 때는 죽는 결말까지는 안 갔지만, 죽겠다는 자살 시도를 하다가 구출되는 사건도 많았다. 한 사례는 잊히지 않는데, 강으로 달음박질해 들어갔는데 강이 너무 꽝꽝 얼어서 빠져 죽지를 못한 사건이다. 얼음판 위를 헤매던 사람을 구출해 내는 과정을 말해주는데 블랙 코미디 같았다. 그러나 강변에서 울며 서 있었다는 가족 이야기는 마음을 아프게 했다. 기억이 흐릿하지만, 어린 아기도 있는 집이라고 했던 것 같다.


며칠 전에는 일가족이 죽은 사건을 이야기해 주었다.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은 오랜만이다. 덤덤하게 대처하게 된 뒤로는 잘하지 않던 이야기를 꺼낸 것을 보면 이번에는 심리적 타격이 좀 있었던 모양이다. 목격한 자살 현장의 모습 때문이었다. 자살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면 안 될 것 같아 대략적으로 말하면 '질식사'를 아주 꼼꼼하게 계획하고 실행한 현장이었다.


(여담으로 나는 남편 덕분에 죽고 싶으면 해 볼 수 있는 방법들을 본의 아니게 많이 알게 되었다. 그런데 알면 알수록 별로 실행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진다. 죽고 나서 발견되는 것까지 모든 정보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죽음의 발견' 부분은 어떤 경우든지 참혹하고 더럽고 추했다. 무슨 일이든 끝까지 제대로 알게 되면 맹렬한 추종, 단언하는 확신은 사라지고 회의감만 남는다.)


40대의 남편과 아내, 8살 아이로 구성된 가족은 자기 집에서 나란히 누운 채로 발견되었다. 남편은 이 모습에 충격을 받은 모양인데, 목 매단 채로 썩어 액화된 시신까지 본 적이 있던 사람이 왜 겉으로 보기에는 덜 끔찍한 현장에 충격을 받았는지 알 것 같았다. 엎어져 죽어 있는 남자의 옆에 있던 비닐을 들추니 아이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아내와 8살 딸아이를 비닐로 잘 덮어두고, 아이 아빠는 그 옆에 엎어져 죽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엄마와 아이가 먼저 죽고 그 아버지가 뒤따라 죽었다는 것인데, 나는 이런 경우를 동반 자살이라 부르는 것에 반대한다.


비단 아이의 경우만이 아니다. 아이의 경우에는 자살에 동의한 적이 없음을 전제로 '아동 살해 후 자살'이라고 칭하자고 이미 공론화되고 있다. (하단의 링크 참조) 그러나 성인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손으로 행한 자살이 아니라 호수로 들어가는 차의 조수석에 앉아 있다든지, 밀폐된 질식 장소에 함께 있다든지 하는 식으로 매우 소극적 행동 양상을 보였다면 그것은 살해 후 자살이라고 불러야 한다. 누군가는 그를 적극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고 자신도 목숨을 끊은 것일 테니 말이다. 사실 법적으로 따지면 자살하는 사람을 보고도 방조한 것조차 죄이다. 앞서의 경우에는 방조가 아니라, 조력 자살의 조력자가 된 후 자살하였다고 봐야 하지만, 불치병의 고통 등에서 가족을 구해내려는 의도가 아니라 자신이 사라진 세상에 가족만 홀로 두기 싫어서 저지르는 모든 조력 자살은 살인이라고 생각한다. 순장도 아니고, 가장이 죽으면 모두 따라 죽어야 하는 이상한 가족주의이다.


그런데 자살에 대한 흥미로운 지표가 더 있다. 자살은 개인 차원이 아니라 집단 차원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개미굴로 비유하자면 개미들만 자살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여왕개미의 뱃속에서도 자살이 일어나고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공동체가 서서히 자살 중인 것이다.



위 도표 출처의 해당 페이지 다른 항목을 보면, 주요국 합계출산율에서 1950년~2021년까지 1.0명이 안 되는 지표를 보이는 곳은 단 두 곳뿐인데, 홍콩과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홍콩에서 2019년과 2020년에 무슨 일이 있었나 생각해 보면, 2020년과 2021년에 출생률이 급감한 이유가 짐작 가능하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꾸준히 미래를 죽이고 있는 형편이다.


그 이유에 대해 비교적 명확한 진단과 치료법을 제시한 기사가 있다. (하단의 링크 참조: '지극히 한국적인 자살률, 지극히 한국적인 출생률')


해당 기사에 따르면 높은 자살률은 전지구적 현상이 아니라 지극히 한국적인 현상이며, 저출생 또한 지극히 한국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이 둘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하나의 문제에 대한 다른 측면일 뿐이다.


'자살이 많은 나라는 아이를 낳지 않는다.'(해당 기사의 황순찬 인하대 교수의 말 재인용)


이 두 현상은 학업과 일자리를 둘러싼 지나친 경쟁체제, 그 과정에서 생기는 극심한 스트레스가 원인이다. 대개 그 이유로 자살하고 그 이유로 아이를 낳지 않는다.


임금 격차,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차별적 사회 안전망, 사회 안전망의 부재로 인한 불안 심리로 사적 자산의 축적이 이루어지면서 만들어진 부동산 시장의 거품, 교육의 서열화 현상과 최상위권 대학을 향한 경쟁에만 집중된 교육 서사들 등, 한국은 "능력도 안 되면서 애를 낳아서 어쩌자는 것이냐?", "억울하면 고등학생 때 열심히 공부했어야지.", "남들 집 살 때 안 사고 뭐 했냐?"는 말이 인신공격이 아니라 충고로 통용되는 이상한 나라이다.


나는 앞서의 사건-아버지에게 살해당한 8살 아이의 죽음-을 전해 들은 뒤로 마음이 내내 무거웠다. 아버지가 죽이고 부정한 것은 딸의 작은 육신만이 아니다. 그 아이의 미래까지 부정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아이가 커서 절대로 행복한 어른이 될 수 없다고 확신했고, 불행한 미래의 싹을 잘라버리려 했던 것이다.


한국은 아시아 문화권의 나라답게 부모와 자녀의 심리적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그것이 살해 후 자살의 동력이면서 동시에 무한 경쟁 교육의 동력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개인 SNS 계정에 자녀의 일상을 게시하는 일을 들 수 있다. 서구적인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부모가 허락 없이 자녀의 사진을 SNS에 게시하는 것 자체가 초상권 침해이다.(하단 링크 참조)


한국에서도 이 문제는 한때 공론화되었다. 그러나 똥 누는 모습, 전라의 사진 등이 아닌 자녀 자랑형 사진은 통상적으로 관대하게 인식된다. 자녀들조차 그것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문화적 특수성으로 반드시 비판적으로 볼 이유는 없다. 어떤 경우에는 아이가 개인 계정을 스스로 관리하는 것보다 부모가 대신 사진을 올리고 소식을 공유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정서적 바탕을 이루는 끈끈한 유대감 때문에 피할 수 없는 비극은 발생한다. 바로 교육 경쟁이다.


어제 고교 동창생과 매우 반가운 통화를 했다. 결혼 전에는 자주 만나던 사이라서 멀리 떨어진 뒤로 소식이 궁금하긴 했다. 그런데 수다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물이 아래로 흐르듯 화제가 자녀 교육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친구는 중학생이 된 딸아이의 수학 사교육이 요즘 화두인 듯했다. 그리고 나에게 단언했다.


"너 그러다 후회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나는 초6인 아들에게 수학 사교육도, 수학 선행도 시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한국의 교육 현실에서 내가 빠릿빠릿한 편이라고는 말 못 하겠다. 그렇지만 친구의 언어에도 문제는 있었다. 사교육업계의 언어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어는 기본으로 모두 한다. 수학도 해야 한다. 과학도 하면 좋다. 전 과목을 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고, 많은 부모들이 그렇게 한다.


여기까지는 사교육업계의 자기 증식 조장 언어로서 부모의 불안을 부추기는 마케팅 언어이다. 그런데 다음 말이 기가 막힌다.


"그런데 다 시키려니 돈이 없다. 집 대출금도 갚아야 하는데."


사교육업계의 논리, 대치동, 수성구, 교육과열지구들의 논리가 자살 방조, 혹은 조력 자살, 혹은 살인의 언어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들의 언어에는 개인들의 가정사, 형편, 특수성들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최상위원 학생과 최상위권 대학으로 이루어진 교육 서사를 반복하고 있고, 그 서사에 평범한 많은 아이들과 부모를 끼워줄 생각이 없다. 그런데도 많은 평범한 가정이 그 서사가 자기들 서사라고 착각한다.

오래 떨어져 있던 친구를 전화 한 통화로 설득하기란 불가능했다. 나는 내 입장을 한 마디로 갈음했다.


"뱁새가 황새를 무턱대고 쫓아가면 가랑이가 찢어져."


가랑이만 찢어지고 말면 다행이다. 대다수가 에듀 푸어가 되어서 미래를 빚에 저당 잡힌다. 그러다가 전세 사기라도 당하면 학자금 대출에 이은 부동산 대출까지 덮치며 경제적으로 파산하게 된다. 그리고 자살한다. 혹은 결혼하고 가정을 꾸려도 아이를 낳지 않는다. 다시 말해 잠재적 자살을 한다.


나는 대학이 끝이 아님을 친구에게 납득시키려 했지만, 잘 통하지 않았다. 대학이 끝이 아니란 말은 대학에서 삶이 끝나는 게 아니라는 위로의 말이나 어떤 비유 같은 것이 전혀 아니다. '자녀에게 돈을 쏟아붓는 일'이 대학에서 끝나는 게 아니란 말이다.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는 많은 청년들이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어학연수를 다녀오고 커리어를 위해 엄청난 돈을 쓴 뒤에야 다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 모두가 몰려가는 길에 끼어들어서 선두에 서려고 버둥대다가 많은 자원을 낭비한 뒤에 다시 다른 길로 몰려간다. 그쪽도 이미 만원 사태지만 방법이 없다. 비정규직에게 미래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라면 다 같이 절벽으로 뛰는 소떼와 같다. 개인적 차원에서 해결하는 게 아니라 사회를 개혁해 해결하려 해야 한다. 이것은 환경운동과 비슷하다. 개인적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미미하다.


아니다. 개인적 차원의 일을 다수가 행하면 사회가 바뀔 수도 있다. 그 개인적 차원의 일은 무한경쟁에 뛰어들어 갈려 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다. 그런 사회를 거부하는 일이다. 미래를 지나치게 걱정하는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보란 듯이 흥겹게 사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미래를 너무 걱정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미국 슬럼가에서 미래를 걱정하는 교육 프로젝트를 벌이는 것과 반대의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할 판이다.


미래를 너무 많이 생각하면 비관적이 되기 쉽다. 현재를 살아야 한다. 미래는 적당히 걱정해야 한다. 모든 미래를 꽁꽁 방비해 둘 수는 없는 일이다.


친구는 내가 변할 거라고, 큰아이가 중학생이 되면 땅을 치며 후회하며 변할 거라고 장담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게는 꿈과 비전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꿈꾸는 가족, 나와 내 아이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현재의 가족 모두가 행복한 방법을 찾아서 실천하며 살고 싶다. 누구 하나가 희생하거나 누구 하나를 위해 희생하는 공동체는 위태롭다. 무너지지 않더라도 현재의 행복을 희생하고 갉아먹으며 비틀비틀 나아가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 가족은 되기 싫다.


아이에게 현재는 항상 미래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시간이라고, 현재 자체는 의미가 없다고 가르치고 싶지 않다. 그렇게 자라서 현재가 행복하지 않아서 미래를 죽이는 중이라고, 혹은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죽인 상태라고 우울한 얼굴로 내 앞에 오는 어른이 되게 하고 싶지 않다. 하나의 가능성을 위해 다른 가능성은 희생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싶지 않다. 노력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즐겨야 한다고 가르치고 싶지 않다. 노력이 곧 고통이라고 가르치고 싶지 않다. 네가 공부를 잘해서, 무엇인가 성취해서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너는 어떤 형태로 존재해도 사랑받는다고 말해주고 싶다. 성취는 내 것이 아니라 오롯이 그 아이 자신의 것이 되게 해주고 싶다. 나는 축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공을 나눠먹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너무 이상주의자인가?


최근에 아이를 공부 '덜 시키는' 영어학원으로 옮겨주었다. 아이가 선행을 시키는 학원 진도 때문에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서 즐겁게 해 주려고 그랬다. 단어 시험을 자주 치지 않고 매일 판타지 동화 원서를 읽고 사는 터라 아이는 아주 행복해한다. 내가 너무 대책 없나?


나는 이런 우리의 대책 없는 이상주의가 좋다. 아이는 나를 닮았다. 과학 관련 대회라면 무턱대고 출전하고, 시험이 망했다고 말하면서도 폴짝거리며 뛰어다니고, 상을 타면 의외라는 듯이 자랑하며 기뻐한다. 져도 분하게 여기지 않고, 이기면 뜻밖의 일로 기뻐하며, 도전 자체가 언제나 즐거운 우리 아들은 서울대나 의대는 못 가더라도 행복하게 살 자질은 충분해 보인다. 이건 담임교사에게 상담을 갈 때마다 들었던 객관적 평들이기도 하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아들 자랑으로 빠진 것 같아 민망하다. 어쩔 수 없다. 나 역시 한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니까.


자랑을 한 김에 하나 더 하며 끝내야겠다.


우리 아들이 자주 하는 말은 "괜찮아. 그럴 수 있어. 다시 하면 돼. 또 하면 돼. 내일 하지 뭐."이다. 앞에서 내가 대단한 이상주의자인 척 큰소리를 뻥뻥 쳤지만 그다지 걸출한 인물은 못 되는지라, 나 역시도 한국이라는 거대 집단의 분위기에 휩쓸려 지나치게 미래를 걱정할 때가 있다. 현재가 뭉개지고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는 데도 모른 척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아들의 태도가 도움이 된다. 아들과 마주 앉아 있으면 그 태도를 배우게 된다.


괜찮아. 그럴 수 있어. 삶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한 번 즐겨보지 뭐. 내가 정해둔 길로만 가야 좋은 것이 나타난다는 보장도 없잖아.



사족)

참고로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의 학부모 모임에서도 중학생 자녀에게 수학 사교육을 처음 시키려고 하면 업계에서 가스라이팅이 장난이 아니라고 들었다. 너무 늦었니, 선행을 안 해놔서 힘드니, 이래서 초등학교 때 선행을 시켜놔야 하느니, 뭐 그런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는 속내가 뻔하다. 아이가 성적이 안 올라도 책임을 회피하고, 학원에 충성했던 다른 아이들의 기를 살려주려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식으로 내 아이의 기를 죽여 버려서 아이가 자신감을 잃고 우울해지며 불안감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이다.


돈을 내고 사교육 서비스를 산 사람은 학부모이고, 원장 및 교사는 서비스 제공자이다. 서비스 요청자가 서비스 제공자에게 원하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쓸데없는 소리 하는 것을 막으시라. 너무 늦었다는 말이 대체 아이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나? 그렇다면 아예 학원을 끊겠다고, 저출생으로 대학 입학 정원이 텅텅 비어 가는 나라이니 다른 가능성을 찾아보겠다고 해보면 알 것이다. 당신이 사는 곳이 대치동이나 그 비슷한 과열지구가 아니라면 대개는 원장의 태도가 돌변할 것이다. 요즘 학원들도 애들이 줄어서 힘들다.





‘동반 자살’ 아닙니다…“자녀 살해, 극단적 형태의 아동학대”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90420.html?utm_source=copy&utm_medium=copy&utm_campaign=btn_share&utm_content=20240531

세이브더칠드런 - [자녀 살해 후 자살 대응 국제 심포지엄 후기] 죽음에서 배울 의무 - https://m.sc.or.kr/mobile/news/storyView.do?NO=71791

세이브더칠드런 자녀 살해 후 자살 대응 캠페인 - https://m.sc.or.kr/sign4child3/

출생율 그래프 출처: 지표누리

https://www.index.go.kr/unify/idx-info.do?pop=1&idxCd=5061

지극히 한국적인 자살률, 지극히 한국적인 출생률

https:https://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5231.html

SNS에 내 아이 사진 올렸다고…쇠고랑 찬 佛부모, 무슨 일 [더오래]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33782#home

최근년도 OECD 회원국 자살현황(도표 그림)

출처: https://kfsp-datazoom.or.kr/international01.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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