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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애라 Nov 21. 2024

내 이야기 사랑의 뒷면

- 마틴 맥도나의 <필로우맨>을 읽고 쓰다

언젠가부터 책 뒤표지에 박히는 추천의 글이나 알*딘 같은 인터넷 서점에서 ‘작가들이 뽑은 올해의 책’, ‘000작가가 추천하는 한국문학’ 같은 마케팅에서의 ‘추천’에는 관심이 없어진 것 같다. 그런 걸 다 챙겨보다가는 도서관을 차려야 할 것이다. 나는 그런 정보를 글의 생산과 소비에 관여된 네트워크를 확인하는 용도로 쓴다. 아하. 이분들이 이렇게 연결되어 있구나. 그런 걸 알 수 있다. 내가 ‘진짜로’ 읽어낼 독서 예상 목록을 작성하는 데 쓰지는 않는 것 같다.


그렇지만 아주 사적인 공간에서, 혹은 소규모의 사람들 앞에서, 혹은 특별한 공간에서 문득 어떤 작가가 추천하는 책이 있다면 다른 마음이 된다. ‘어떤 책이기에 이렇게 불현듯 생각나서 추천하실까?’ 그래서 찾아 읽어보면 대개는 의아한 마음이 들게 된다. 개인의 취향을 확인했다는 의의를 찾게 되고, 그것으로 그냥 끝이다.


<필로우맨>은 김이환 소설가의 추천 덕분에 읽은 책이었다. 화려한 추천사 같은 것도 없이 그저 책 이름 하나만 던진 추천의 글이었는데, 이상하게 책 제목이 기억에 남았다. 책도 사람처럼 인연이 닿으면 애쓰지 않아도 만나게 되나 보다. <필로우맨>은 꼭 봐야겠다는 마음이 없었는데 읽게 되었다.


치과 치료를 하고 나온 날이었다.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우니까 집에 들어가기가 싫고 진정제가 필요했다. 마취가 덜 풀려 반쪽으로만 웃을 수 있는 얼굴을 하고 도서관에 갔다. 도서관에 가면 진정제들이 잔뜩 있으니까 마취가 풀리는 동안만 쉬다가 갈 생각이었다. 신간서적 코너에 강렬한 빨간 표지의 <필로우맨>이 있었다. 내용도 모르고 뽑아든 책이었다.


막상 책을 펴자 잠이 너무 쏟아졌다. 잇몸을 마취하면 뇌도 약간 마취가 되는 것일까? 글자를 눈으로 읽어도 뜻은 파악되지 않았고 눈꺼풀이 내리닫혔다. 두어 장 넘기지 못하고 책은 빌려서 도서관을 나왔다.


집에 와서 잠깐 자고 마취가 풀리자마자 커피 한 잔을 마시고 <필로우맨>을 폈다. 다른 할 일이 많아서 진짜 읽을 생각은 없었다. 자기 전에 읽어야지 하고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읽던 부분에 표시나 해둘까 싶어 펼쳐든 거였다. 그런데 도서관에서와 달리 문장의 의미가 파악되기 시작하자 책을 내려놓지 못했다. 슬쩍 펴들었다가 마지막까지 읽어 버렸다.


어떤 책은 글감이 될까 싶어 읽었지만 막상 읽고 나면 하고 싶은 말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가 하면, 어떤 책은 읽고 나면 글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독서감상문 따위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고 아무리 결심해도 어쩔 수가 없다. <필로우맨>이 그런 책이었다.


필로우맨은 희곡이다. 희곡은 공연을 목적으로 쓰여지는 글이지만, 지금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형식이 되었다. <필로우맨> 대본은 그 자체로 충분히 위대한 예술이다. 그러나 공연을 볼 수 있다면 보고 싶다. 국내에서도 2007년에서 2015년에 걸쳐 4번 공연한 모양인데(나무위키의 ‘필로우맨’ 항목 참조), 나는 전혀 몰랐다. 지방에 거주하는 서러움은 이런 정보를 뒤늦게 접할 때 조금 짙어진다. 2007년 초연의 최민식, 윤제문 캐스팅은 입이 딱 벌어졌다. 그 해에 나는 결혼을 하고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지방으로 내려왔는데, 시간을 되돌린다면 결혼을 늦추고 필로우맨을 본 후에 낙향하고 싶다. 과장이 아니고 진심이다.  


<필로우맨>은 가상의 전체주의 국가를 배경으로 한 용의자를 심문하는 취조실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연극 공연을 위한 대본이므로 장소와 시간이 매우 한정되어 있다. 극은 ‘카투리안’이라는 작가이면서 도살장의 잡부인 남자가 경찰서 심문실에 앉아 있고, 취조를 위해 두 형사가 들어오며 시작된다.


시작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약간의 블랙 유머가 느껴지는 문장들이 이어졌지만 ‘유머겠군’ 하는 생각만 하고 웃지 않고 지나쳤다. 남성적이고 가학성이 짙은 유머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느낌이 초반부 1막을 지나가며 반전되는데, 극이 진행되면서 그러한 문체가 작가의 객기나 습관의 산물이 아니라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카투리안: 그의 머리는 원형 베개였어. 그리고 머리에는 단추로 만든 두 눈과 미소 짓는 커다란 입이 있었는데, 항상 미소를 짓고 있었어, 항상 이빨이 드러났어. 이빨도 베개로 만들어졌어. 작고 하얀 베개들.
마이클: ‘베개들’. 네 입도 필로우맨 입처럼 씨익 웃어봐.
(카투리안이 바보처럼 활짝 웃어 보인다. 마이클은 카투리안의 입술과 뺨을 다정하게 어루만진다.)
카투리안: 그래, 필로우맨은 이렇게 생겨야 했어. 부드럽고 안전해 보여야 했지. 그가 하는 일 때문에 말이야. 그가 하는 일은 아주 슬프고 아주 어려운 일이었거든…….


<필로우맨>에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들이 잔뜩 등장하는데, 그 중 가장 베개처럼 폭신하고, 울 때 끌어안는 베개처럼 슬프면서 덜 잔인한 이야기가 ‘필로우맨’이다. 그러니까 안 잔인한 게 아니고 덜 잔인한 이야기이다. 필로우맨의 모든 이야기에는 잔인성이 내재되어 있는데, 단 하나의 이야기만 예외다. 그것은 스포일러이므로 말할 수 없다.


극 중에 삽입되는 많은 이야기들은 상당히 구어적 이야기 전통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 이야기들이 등장하는 방식 때문이다. 카투리안이 쓴 소설은 소설 자체로 낭독되기보다는 심문 과정에서 인용된다. 당연히 ‘필요없는 부분’은 건너뛰고 인용되며, 축약되어 줄거리로 서술된다. 일부는 카투리안과 마이클(카투리안의 형)이 나누는 대화 속에서 정말로 ‘구전 이야기’의 형태를 하고 등장하기도 한다. <필로우맨>의 이런 삽화 형태들은 의도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이야기가 구전 동화처럼 ‘옛날 옛날에’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구전되는 많은 설화들과 마찬가지로 <필로우맨> 속의 삽화들은 대부분이 슬프고 잔혹한 이야기들이다. (심지어 한 이야기는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의 변형 버전이다.) 슬프고 잔혹한 그 이야기들은 현실의 살인 사건을 밝혀내는 증거물로 인용되면서 현실보다 덜 잔인하고 더 가벼운 것이 된다. 혹은 바보형 마이클의 고통을 위로하기 위한 이야기가 되면서 잔인성이 희석된다.


이것이 허구적 이야기(픽션)의 아이러니이고 딜레마이다. 꾸며내는 이야기의 잔인성에 대한 딜레마는 카투리안 자신의 부모와 형제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다음은 <필로우맨>에 드러나 있는 카투리안의 가족사를 ‘이야기의 생산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내가 재구성한 것이다. 재구성 과정에서 주관적 해석이 첨가되었다.


자식을 고문하는 어떤 부모가 있다. 고문후유증으로 아이는 바보가 되어간다. 아이가 바보가 되어가는 것은 고문의 부수적 산물이지 부모의 계획이 아니었다. 부모는 그저 아이를 고문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들은 고문으로 훌륭한 아이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지도 못했지만, 고문으로 휼륭한 아이를 만들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아이는 처음부터 ‘약간’ 바보같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화풀이를 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차차 고문이 되어갔다.


부모는 둘째 아이는 고문하지 말고 칭찬으로 키워야지 결심한다. 어쨌든 고문은 첫 아이에게 하고 있으니 또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둘째는 형제가 고문으로 지르는 비명을 들으며 자라난다. 물론 둘째는 형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집안 어딘가에 고문 당하는 형이 있다는 사실을 부모가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른이라면 집안에서 선명한 비명소리가 들리는데 그것이 환청일 거라 생각하지 못할 테지만, 둘째는 ‘아직’ 아이에 불과하므로 모든 소리가 자기 머릿속에서 생겨나는 줄 안다.


둘째는 그 비명이 자기 머리속에 있다는 착각 때문에, 그러나 결코 혼자만의 망상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그 생생함 덕분에 기괴하고 슬픈 이야기를 잘 쓰는 사람-작가가 된다. 형제의 고통을 질료 삼아 이야기를 빚어내는 사람이 된 것이다. 모든 칭찬은 둘째의 이야기에 집중된다. 고문 당하는 바보 형은 둘째의 이야기만 기다린다. 그것이 자신의 삶에 유일한 즐거움이므로. 그것이 자신의 고통을 거름 삼아 피어난 꽃이므로.


형제는 자라나고 청소년이 된다. 이제 망상과 진실을 구분할 힘이 생겼다. 이야기만 들으며 고문실에 갇혀 있는 바보 형은 둘째에게 ‘직접’ 연락해 이야기를 더 요구하고, 작가인 둘째는 불쌍한 바보 형의 존재와 잔인한 부모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다. 작가는 둘째를 대신해 부모를 살해하고 형을 돌보며 살아간다. 형은 작가의 출판되지 않은(않는) 이야기를 소비해주는 유일한 사람이면서, 작가에게 이야기를 쓰게 만드는 동력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형에게 읽힘으로써 또다른 부수적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이 이후는 결말에 관한 스포일러이므로 밝히지 않겠다.


<필로우맨>은 ‘이야기가 인간을 잔인성으로부터 구원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잔인성을 획득하는 과정’처럼 보인다. 더 잔인한 이야기, 더 슬프고 잔혹한 이야기를 기대하는 인간 심리, 잔인성과 잔혹함으로부터 타인을 구원하려는 욕망, 그리고 그 욕망의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자기 과시의 욕망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고귀함과 희생, 자기 과시욕과 집착을 오가는 <필로우맨>의 인물들 속에서 나의 윤리관은 완전히 길을 잃었고, 잠이 들자 꿈 속에서 길을 잃은 채 슬피 울었다.


세계를 다른 시각으로 보게 만드는 책들이란 그러하다. 내가 알던 길을 뭉개버리고 꿈 속에서조차 황망한 채로 헤매게 만든다.


위의 문장들은 비유가 아니다. 나는 정말 꿈을 꿨다. 피에 젖은 필로우맨이 나타나 나를 위해 울어주었다. 나는 너의 이야기가 너무 잔인하고 슬퍼서 좋았노라고, 그래서 정말 미안하다고 말했다. 왜 필로우맨에게 미안했을까?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게다가 그 이야기들은 필로우맨의 것이 아니고 카투리안의 것이었는데.


필로우맨조차 카투리안이 지어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나는 왜 미안했을까? 더욱이 ‘좋아해서’ 미안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재미있는 이야기’의 아이러니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것들의 뒷면에는 위험하고 못된 것들이 잔뜩 묻어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을 알면서도 이를 썩게 하는 사탕을 빨듯이 이야기에 탐닉하는 것이다. 슬프고 잔인할수록 빨려든다. 하지만 마음이 아프다. 마음 아픈 몰입에 나는 죄책감을 느낀다.


동전의 앞면과 뒷면 같은 독자의 마음.

소름 끼치도록 잔인한 이야기들이 싫다고, 해피엔딩을 원한다고 말했지만, 정작 초록색으로 물든 소녀가 활짝 웃는 것을 보게 되면 실망해 버리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초록 소녀가 뭐냐고? 그 비밀은 책을 직접 읽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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