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언어> 송은혜
*21년에 쓴 글
요즘 즐겨보는 <슈퍼밴드2>라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음악천재들이 나와서 멤버를 바꿔가며 밴드를 결성하여 대결을 펼치고, 최후의 우승밴드 한 팀을 가리는 밴드오디션 프로그램이다. 세상은 넓고 천재는 많으며, 그중 음악천재는 특히나 많은 것 같다. 다들 재야의 고수처럼 어디에 숨어있었던 건지 나오는 사람마다 현란한 기술과 풍부한 표현력으로 심사위원들과 시청자들을 놀라게 한다. <슈퍼밴드2>를 볼 때마다 음악이 삶의 전부인 사람들의 투지가 느껴진다. 그들의 연주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항상 신선한 충격을 준다. 그들이 연주하는 선율 속에는 새로운 세계의 창조와 소멸이 있다.
<음악의 언어>를 쓴 송은혜 작가는 한국과 미국, 프랑스에서 오르간, 하프시코드, 음악학, 피아노, 반주를 공부했고 현재 프랑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음악을 재료로 기록한 서른세 개의 일상 변주곡을 묶은 이 책은 음악 선생으로서의 일상뿐 아니라 음악으로 삶을 해석하는 연주자로서의 일상이 담겨있다.
또한 음악 선생님의 면모를 한껏 보여주며 여러 클래식 작품과 용어, 작곡가에 관해 친절하게 설명해주기도 한다. 음악 용어들을 알지 못해도, 지금 말하고 있는 이 음악가에 관해 잘 알지 못해도 괜찮다. 이 책에서 읽어야 하는 것은 음악적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일상 같은 음악을 하고 음악 같은 일상을 사는 사람의, 음악을 향한 순수하고 아름다운 시선이기 때문이다.
위에 ‘일상’을 쓰면서 지금껏 일상이라는 단어가 본래 가지고 있던 무게감을 얼마나 지운 채로 사용해왔는지 되돌아보았다. 무언가로 일상을 채운다는 건 그것으로 인생을 배우고 자아를 만들어간다는 말과 같지 않나. 우리 삶을 지탱하는 건 어쩌다 꽝 하고 내리치는 충격이 아니라 사르르 쏟아지는 모래처럼 조금씩 꾸준히 쌓이는 나날이므로.
음악이 일상이 된 사람은 음악으로 삶을 체험하고 표현한다. 음악으로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나의 마음을 전하며, 나와 세상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그렇게 하나의 언어로 자리 잡은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연주자의 마음을 듣는 것 같은 느낌, 우리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마음이 통하는 순간이다.
“음악은 깊은 샘처럼 연주하는 사람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비춘다. (...) 청중은 연주자가 겸손하게 만들어낸 샘의 표면에 잊고 있던 자신의 마음이 조용히 떠오르는 것을 알아챈다. 악보에서 마음까지 곧장 달려가는 음악의 은유 덕분이다.(p.103)"
<슈퍼밴드2>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참가자들의 기교를 보는 것도 좋지만 이 프로그램의 진짜 재미는 다른 데 있다. 원탑 밴드 결성이 목적인 만큼 누구와 팀을 이루느냐가 중요한데, 누굴 만나는지에 따라 자신의 능력치를 100% 발휘하는 사람이 있고 반도 보여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각자의 역량을 보여주기에 급급하면 프로그램의 본래 취지에 어긋나기 때문에 조화를 잃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심사위원들이 강조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본인을 드러내려 하기보다 밴드 사운드에 집중할 것.
이 밴드 사운드가 책에서는 앙상블로 나온다. 그리고 앙상블을 완성하기 위해 조화를 잘 이루는 법을 자세히 안내해준다. 첫째, 악보를 읽으면서 나의 역할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할 것. 설사 주인공이 아닐지라도 전체의 균형을 생각하며 주선율이 빛나도록 받쳐주는 조연의 매력을 느낄 것. 둘째, 함께 연주하는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귀 기울일 것. 저자는 앙상블에서의 듣기 능력을 인터뷰에 비유한다. “최선을 다해 듣지 않는다면 뒤따르는 질문은 생기도 의미도 잃고, 대화는 뚝뚝 끊긴다.(p.85)” 마지막으로 자기 확신. 앙상블을 연주할 때는 남의 소리를 따라가기만 해서는 안 된다. 나만의 탄탄한 소리로 타인과 어우러질 수 있도록 나의 역할과 존재 이유를 깊게 이해해야 한다. 내가 돋보이도록 욕심내라는 말이 아니다. 나만 들리도록 욕심낼 때 앙상블은 실패한다.
우리 일상도 각자의 템포와 소리를 가진 주변 사람들로 인해 만들어진다. 나만의 소리로 내 삶을 완성할 수는 없다. 나를 들어주는 사람, 자신을 들려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나만의 소리를 낼 줄 알되 다른 이의 소리에 집중하는 일이 앙상블의 핵심인데, 그 균형을 지키기가 참 쉽지 않다. 가끔은 내 목소리를 더 내고 싶고, 다른 이를 음소거 상태로 만들고 싶어진다. 그러다 서로에게 상처를 줄 때도 있다. 삶이란 예측할 수 없고 후회되는 상황의 연속이다. 준비된 악보가 있으면 좋으련만, “어쩌겠는가, 일상은 즉흥연주인 것을.(p.89)”
그래서 우리에게는 연습이 필요하다. 나의 언어를 위해서, 당신의 언어를 위해서, 한글의 가나다부터 익히듯 일상의 패턴을 연습하여 때에 따라 새롭게 변주해보고, 다른 이에게 최선을 다해 귀 기울이려 노력하고 타인의 소리에 내 소리를 어울리게 얹어보는 것. 그 속에서 나의 소리에 대한 확신을 놓치지 않는 것.
그러다 보면 일상이라는 즉흥연주를 즐기게 되는 날도 올 것이다. 조금은 담담하게, 나에게 주어진 모든 음표를 연주하려 하기보다 한두 개쯤은 버릴 줄 아는 사람이 될 것이다. 안단테(걷는 속도로)의 템포를 사랑할 줄 알고, 프레스토(매우 빠르게)의 템포를 즐길 줄 알며, 다른 이의 라르고(아주 느리게)를 품어줄 수 있을 것이다. 조용히 떠오르는 다른 이의 마음을 티끌 없이 비춰볼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당신은 어떤 언어를 들려주겠는가. 나는 잠잠히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