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시작되는 마을에서

산티아고 순례길 Day23

by 재인

발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았지만, 컨디션만큼은 최고였다. 알베르게에서 나눠준 큼지막한 극세사 담요 덕분에 푹 잘 수 있었고, 깊은 수면은 오늘을 든든하게 만들어줬다. 추적추적 비가 내렸고 우비를 입고 비장한 마음으로 알베르게를 나선다. 비에 젖은 돌길은 미끄러웠고,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기에 나는 나의 라이트 빛에만 의지해 걷기 시작했다. 앞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빛이 닿는 아주 좁은 범위만이 내가 인지하는 나의 길이었다. 조심스럽게 발을 옮기며 걸어가던 중, 문득 길이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직진하면 될 것 같았는데, 왠지 모르게 빙글빙글 길을 돌아가고 있다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라이트를 높이 들어 앞을 비추자, 내 눈앞에 거대한 기둥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철의 십자가였다.


해가 뜨고 밝았다면 멀리서도 그 존재감을 느낄 수 있을만큼 인상적인 작고 가느다란 기둥끝에 금속 십자가 하나 얹혀있는 형태. 나는 이 곳을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만 너무 어두워서 사실 십자가는 보지도 못했다. 십자가 아래에는 전 세계 순례자들이 제각각의 마음을 담아 올려놓은 수많은 돌들과 물건들이 소복이 쌓여있었다. 철의 십자가는 순례길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소 중 하나다. 많은 순례자들이 이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이 살아온 곳에서 돌 하나를 챙겨와, 그 돌에 각자의 염원이나 짐을 담아 이곳에 내려놓는다. 단지 내가 이곳을 지나쳐간다는 작은 흔적도 되겠지만,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을 짓눌러온 무언가를 내려놓는 의식 같은 것이다.


나는 따로 돌을 챙겨오진 못했다. 배낭 무게 하나에도 예민했던 나에게, 그 작은 돌 한 개 조차 사치처럼 느껴졌던 시점이 있었으니까. 게다가 순례길에 오를 때 부터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나, 큰 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고, 이 삶을 가능하게 해준 세상과 부모님께 마음을 전하는 시간으로 이 순간을 받아들였다. 막상 철의 십자가 앞에 서서 수많은 돌들과 물건들을 바라보니, 이 길을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걷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이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말자는 다짐을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새겼다. 그 모든 것들 위로 조용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돌에 스며든 사연 하나하나를 조용히 어루만지는 것 처럼. 이 비가 이 길 위를 걷는 모든 순례자들의 짐을 조금씩이라도 씻어내려주기를 바라며 철의 십자가를 지났다.


철의 십자가를 지나자 한 사람씩만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비좁은 숲길이 나왔다. 빗줄기는 점점 잦아들었고, 그 비에 씻겨 내려온 풀내음이 진하게 코 끝을 스쳤다. 안개가 천천히 내려앉은 숲길을 걷는 동안, 하늘 위로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고 이내 예쁜 일출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노을은 우연히 마주치는 선물 같다. 하늘을 올려다 본 그 찰나에, 운 좋게 타이밍이 맞아야만 만날 수 있는 것. 그래서인지 언제나 조금 멀게 느껴진다. 반면 일출은 내가 의지를 가지면 마주할 수 있는 고요한 약속 같다. 새벽의 어둠을 뚫고 일찍 눈을 떠서,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한 걸음씩 걸어가다보면, 어느 순간 어둠과 빛이 맞닿는 경계위로 해가 천천히 떠오른다. 그 시간은 조용하고, 세상은 아직 잠들어 있고 나는 모든 고요의 중심에 서 있다. 그래서 나는 노을보다 일출이 좋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으니까. 앞으로 언젠가 힘든 일이 생기거나 마음에 짐이 생긴다 해도, 내가 끝까지 의지를 놓지 않고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찬란한 햇살이 내 안에도 스며들 거라고 믿고 싶다.


다시 높은 산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길도 점점 험해졌고, 몇 주 동안 긴 여정을 걸어온 긴 여정을 걸어온 밭에는 무리가 많이 간 상태였다. 이곳은 조금만 방심해도 쉽게 다칠 수 있을 만큼 위험한 길이었다. 특히 오랜시간 걷느라 체력과 집중력이 떨어진 순례자들에겐 더욱 조심스러운 구간이었다. 오르막을 힘겹게 넘어서자 산 아래로 작은 마을이 내려다 보였다. 숨을 돌리며 마을을 지나치던 중, 프란체스카를 만났다. 나는 그에게 철의 십자가를 봤는지 물었고,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무 어두워서 그냥 지나쳐버렸어” 그 말에 아쉽겠다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는 이어서 설명했다. 고향에서 직접 가져온 돌이 있었기 때문에, 철의 십자가를 놓치고 나서 택시를 타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돌을 내려놓고 다시 이 마을로 돌아라 우리를 만난거라고.


‘그 정도로 간절 했구나‘

나는 철의 십자가가 단지 유명한 장소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정말 꼭 도달해야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는 장소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마음속으로 조용히 바랬다. 꼭 그의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작가의 이전글비가 시작되는 마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