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무언가 거대한 것 앞에서

산티아고 순례길 Day0

by 재인

늦은 밤 파리와 조용히 작별 인사를 나누고 택시에 올랐다. 택시 창문 밖으로 주황 가로등이 비추는 도로를 보며 옅은 긴장감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목적지는 생장. ‘생장 피에드포르’라는 이름만 아는 곳이었다. 사실 순례길의 시작이 프랑스인 줄도 몰랐고 프랑스 어디쯤 있는지도 잘 몰랐다. 다만 순례길의 출발지라기에, 예약한 티켓을 따라 무작정 길을 나섰다. 나의 여행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준비보다는 저지르는 것이 먼저였고, 미리 알지 못했던 것들이 곧 설렘이 되곤 했다.


파리 기차역에 도착해 플랫폼으로 향하니, 거대한 기계 덩어리처럼 생긴 야간열차가 두 눈에 들어왔다. 마치 석탄을 잔뜩 실어 나르는 화물열차 같았다. 내가 탈 기차는 3층 침대가 설치된 침대칸이 있는 야간기차였다. 1층이나 3층 침대를 바랐지만, 2층 침대에 배정받았다. 분명히 티켓을 살 때 어떤 층을 선호하냐고 물어봐서 한참 1층과 3층을 고민하며 1층을 선택했던 기억이 있는데 2층이 배정되어서 문 앞에서 ‘표가 잘못 나온 게 아닐까’하고 티켓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을 때, 머리칼이 찰랑거리는 외국인 남자가 내가 도움이 필요해 보였는지 내 티켓을 보며 ‘여기 맞아. 너는 2층 침대야’라고 친절히 알려주었다. 나도 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을 뿐이다.

내가 지낼 칸에 들어가니 캐리어를 놓을 곳이 없어 우왕좌왕하던 찰나, 아까 그 찰랑 머리 남자가 또 다가와 “1층 침대 아래에 넣으면 돼”라고 조용히 알려줬다. 그리고 1층 침대에 누워있던 아저씨도 날 보고 웃으며 엄지를 들어 올렸다. 2층에 배정된 건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이런 것들이 나의 긴장감을 사르르 풀리게 해 준다. 단지 기차 한번 타는 일이었지만, 낯선 땅에서 받은 작은 친절과 웃음이 생각보다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 따뜻함이 어쩌면 이 여정을 시작하는 데 필요한 첫 격려였을지도 모른다.

객실 안은 작고 비좁았다. 양쪽으로 3층 침대가 나란히 놓여있고, 한 칸에 무려 여섯 개의 침대가 있었다. 자리에 앉기도 어려울 정도로 공간은 협소했지만. 이럴 때는 내 작은 키가 참 고마웠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창 밖의 풍경은 어두워졌다. 객실 안도 조용히 잠들 준비를 시작했다. 기차의 진동과 소음 속에 뒤척이는 소리가 묻혀 파리숙소 도미토리에서 자던 밤보다 훨씬 편하게 잠들 수 있었다.


그렇지만 완전히 깊은 잠은 아니었다. 설렘과 걱정이 섞여 마음이 붕 뜬 탓에, 몇 번이고 선잠을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잠에서 깰 때마다 어두운 프랑스 풍경이 창밖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혹여나 도착지를 지나칠까 싶어 여러 번 휴대폰으로 도착 시간을 확인하면서도, 고개를 돌려보면 1층 침대에 누운 프랑스 할머니는 작은 등을 켜놓은 채, 페이지를 넘기는 손길이 한두 번 야간열차를 타본 게 아니신 거 같았다. 3층 침대 위에서는 키가 훤칠한 금발 남자가 다리조차 제대로 뻗지 못한 채 몸을 구기고 자고 있었다.


그렇게 기차 안에서 하루가 흘러갔다. 목적지를 향해 천천히 달리는 기차, 산티아고 순례길은 아직 시작도 안 했지만 이미 여정의 한복판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낯선 사람들과 낯선 공간, 그리고 편히 잠들 수 없는 나. 순례길은 그렇게 조용하게 야간열차 위에서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