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Day0
기차를 갈아타기 위해 바욘역에 도착했다. 나는 이 역이 야간열차의 종점인 줄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다. 우당탕탕 짐을 챙겨 내리고, 바욘역에서 생장으로 가는 기차를 예매하려고 키오스크 앞으로 갔다. 현재 시각은 오전 8시. 오전 10시 기차는 이미 매진이었고, 오후 12시 기차만 남아 있었다. 4시간을 기다려야 했지만, 예매를 미리 안 한 내 탓이라 생각하며 담담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역 안에 매점 옆, 작은 테이블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커다란 트레킹 배낭을 멘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다. 다들 산티아고 순례길을 시작하러 여기로 모인 걸까?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역 안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10시 기차가 파업으로 취소된 것이다! 당황한 표정의 순례자들이 역을 분주히 돌아다녔고, 역무원들은 남일이라는 듯이 대처했다. 한국인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대책을 세우는 모습이 모여 쭈뼛쭈뼛 그 근처에 머물며 상황을 읽으려 노력했다.
그때 몇몇 사람들이 항의하자, 역무원이 결국 생장까지 가는 버스를 마련했다.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오후 12시 기차니까.. 그래서 유유히 사라지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매점에서 빵과 커피를 사 와 엄마와 통화를 하려고 딱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한 역무원이 나를 향해 다급한 손짓을 하며 뛰어왔다. 그녀는 뭐라고 설명도 없이 나보고 당장 버스를 타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당황해서 “나 12시 기차인데? 10시 기차를 예매하지 않았어! “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급하게 등을 떠밀며 나를 버스로 데려갔다. 그렇게, 얼떨결에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 안은 이미 예정시간보다 늦게 출발한 상태였다. 모두가 커다란 배낭을 안고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나는 이 사람들을 다 지나서 맨 뒤에 남은 한자리에 앉았다. 옆에는 우연히 한국인 남자분이 앉아 계셨는데, 표정이 꽤 좋지 않으셨다. 사실 아까 역에서 이 분을 봤지만, 분노가 가득한 표정이 조금 무서워서 슬쩍 시선을 피했었다. 하지만 바로 옆자리에 앉은 이상 모른 척할 수도 없어 조심스럽게 ”혹시 한국분이세요? “하고 말을 걸었다. 알고 보니 이 분은 오전 7시부터 역에 있었지만 기차 파업으로 줄줄이 표가 취소되면서 매우 지치신 상태였다. 원래는 생장 도착 직후 바로 걷기 시작할 계획이었는데, 모든 일정이 틀어져버려 화가 많이 나셨다. 나는 “하루 늦게 출발하시는 건 어떠세요?”라고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이미 숙소 예약까지 모두 마친 상태라 선택지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요즘은 첫날 코스를 줄여서, 생장에서 론세스바예스로 곧장 가지 않고 중간지점인 오리손까지 택시로 이동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씀드렸다. 그제야 그의 얼굴에 미세하게 안도감이 스쳤다. ”그런 방법이 있었어요? “라며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지셨다
그렇게 우리는 버스를 타고 생장으로 가는 길,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순례길을 앞둔 긴장감과 계획, 기대 같은 이야기를 나눴다. 시작부터 한국인을 만나 말을 나누게 된 것도, 내가 그의 꼬인 계획을 조금이나마 풀어드릴 수 있었다는 것도, 내게는 긴장했던 마음을 조금 누그러뜨려주는 경험이었다.
난 오늘 결국 계획과는 다르게 기차 대신 버스를 탔고, 계획보다는 일찍 생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론세스바예스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