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말 너머 우린 모두 지구인

산티아고 순례길 Day0

by 재인

첫 알베르게를 체크인하고, 나는 마을을 혼자 걷고 또 걸었다. 혼자 여행하는 것에 딱히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나였지만, 그날의 고요함은 낯설게 느껴졌다. ‘800km를 혼자 걷는다’는 사실은 막연한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채로, 마음 깊은 곳에서 느슨하게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생장은 정말 작은 마을이었다. 걷다 보면 같은 길을 자꾸 다시 걷게 될 정도로 길이 금세 익숙해졌다. 언덕을 오르고, 내려가고, 또 오르기를 반복했고, 마을 아래 있는 슈퍼도 괜히 세 번이나 들렀다. 필요해서라기보다는, 그냥 몸을 움직이고 싶어서 그랬던 거 같다. 마을 꼭대기, 전망대 같은 언덕에 올랐을 땐, 주황색 지붕과 하얀 벽의 집들이 짙은 초록 숲에 둘러싸여 오밀조밀 모여있는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 두 눈에 들어올 때 그제야 조금 실감이 났다. 정말 시작되는구나. 사실 나는 그냥 걸으면 걷는 거고 하면 하는 거지라고 생각했었는데 내 마음 어딘가에선 크게 긴장하고 있었던 거 같다. 한동안 그곳에서 풍경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저녁을 사러 또 슈퍼를 갔다. 늘 해왔던 여행인데, 이곳에서는 혼자 식당에 들어가는 게 더 외롭게 느껴졌다. 슈퍼에서 저녁으로 먹을 요구르트와 과일을 사서 알베르게 식당으로 내려갔다. 이미 식당 안은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나는 태연하게, 그리고 조용히 제일 구석 자리에 앉았다. 그냥 의자에 앉았을 뿐인데 ‘나 영어 못하는데!’ 말 걸까 봐 심장이 요동쳤다. 내가 영어 못하는 걸 알면 실망할까. 그 와중에도 옆 테이블의 웃음소리가 자꾸 귀에 걸렸다. 낯선 언어였지만, 낯설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where are you from?”

단순한 말 한마디지만 유럽에서 아시아인이 먼저 말을 걸어서 그런지, 눈길을 끌기엔 충분한 문장이었다.

이스라, 안토니오, 유레나, 그리고 패트릭

그들은 모두 스페인에서 왔다. 이스라, 안토니오, 유레나는 같은 직장에서 일하다 함께 순례길을 시작했고, 이미 며칠 전부터 걷고 있었다. 오늘은 생장에서 하루 머무는 날이었다. 패트릭은 순례자가 아니었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 생장에서 왔다고 했다. 나는 그때 알게 됐다. 이곳이 모든 사람의 ‘출발점’은 아니라는 걸. 어떤 이들에겐 단지 스쳐가는 마을일 수도 있다는 걸. 난 쓸데없이 비장했었다.


네 사람 모두 스페인령 ‘테네리페’라는 섬 출신이었다. 처음 듣는 섬 이름이었고, 신기하게도 이들 역시 여기서 만나 대화를 나누다 고향이 같다는 걸 알게 되어 친구가 되었다고 했다. 나와 이들과의 인연도 그렇게 우연처럼 시작되었다. 살면서 외국인과 이렇게 오래 대화해 본 적이 있었을까? 한국에서는 늘 영어를 쓸 때마다 조심스러웠다. 발음이 어색할까, 문법이 틀릴까 눈치를 봤고, 그게 싫어서 아예 말문을 닫을 때도 많았다. 그런데 여기선 그런 눈초리가 없었다. 단어가 서툴러도, 문장이 엉성해도, 서로의 눈을 보고 웃으며 알아듣는 순간이 있었다.


그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서로 언어도, 문화도 다르지만 지구라는 같은 행성에 살고 있으니까. 그 사실만으로도 이렇게 웃을 수 있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 그게 좀 감동이었다. 스페인 음식인 빠에야를 먹어보고 싶다고 하자, 그들은 다음 큰 도시 팜플로나에서 다시 만나 꼭 함께 먹자고 약속까지 했다. 실현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말만으로도 따뜻한 약속이었다. 그렇게 순례길의 첫날밤, 낯선 마을에서, 낯선 말로, 내게도 첫 외국인 친구들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