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레네산맥을 쉽게 넘는 법

산티아고 순례길 Day1

by 재인

드디어 첫날. 해가 뜨기 전 어둑어둑할 때 눈을 떴다.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화장실로 향했는데, 거기서 어제 만난 이스라를 마주쳤다. 서로 눈이 팅팅 부어오른 얼굴로, 목소리도 잠긴 채 “굿모닝~..”하고 인사를 나눴다.

주변은 분주했다. 모두 침낭을 접고, 배낭을 싸고,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 코스는 생장에서 론세스바예스까지. 첫날부터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넘어가는 피레네산맥을 넘는 여정이었다. 나는 ‘동키(Donkey)’서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동키는 배낭을 목적지까지 배달해 주는 시스템인데, 알베르게 입구에 준비된 봉투에 주소를 적고, 돈을 넣고, 배낭에 묶으면 끝이다.


그런데, 문제는 보조가방을 안 챙겼다는 것! 물이나 우비 같은 필수품을 담을 공간이 없었다. 여권이나 지갑을 넣는 가방은 너무 작았고. 내 눈에 들어온 건 ’빨래망‘ 빨래망에 손잡이가 달려있길래 물과 우비를 넣고 출발했다. 피레네 산맥을 빨래망 하나 들고 걷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그 시작이 꽤 인상 깊었는지, 나중에 어떤 한국 순례자분이 “빨래망 들고 피레네 넘으셨던 분 아니세요?”라고 물어보기도 했다. 빨래망 아이템으로 존재감 +3 정도 얻은 셈이다.

아침 8시, 드디어 첫걸음을 내디뎠다. 아직 어두운 길을 라이트에 의지해 걷기 시작했다. 새벽에 비가 많이 왔는지 땅은 축축했고, 공기에 흙냄새와 비냄새가 섞여 있었다. 비가 그쳐 다행이었다. 빨래망이 자꾸 눈에 밟혀 피식 웃음이 났다.


생장을 벗어나자마자 길을 잘못 들었다. 순례길 표식이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가 보다. 10분쯤 헤매다 제대로 된 길로 돌아왔고 그제야 순례자들과 마주치기 시작했다. “부엔 까미노(Buen Camino)!” 순례길에서는 걷다가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건넨다. 좋은 여정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 나의 첫 ‘부엔 까미노’가 돌아왔다. 발걸음이 조금 더 가벼워졌다.


해가 떠오르자 하늘을 은은한 분홍빛으로 물들었고, 산과 들판 위로는 부드러운 운해가 낮게 피어올랐다. 살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아침을 맞이한 적이 있었나 싶었다. 오늘은 25km를 걸어야 하지만, 자꾸만 내 걸음을 느리게 했다. 몇 걸음마다 뒤를 돌아보고, 또 한참을 바라보게 됐다. 이 풍경을 지나쳐야 한다는 게 아쉬울 만큼 좋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순간들을 계속 마주하게 될 거란 생각에, 조용히 마음이 벅차올랐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경사가 점점 가팔라졌다. 혼자 걷다 보니 속도가 빨라졌고, 사람들을 지나치며 계속 “부엔까미노!:를 외쳤다. 그러다 어제 만난 익숙한 얼굴들과 마주쳤다! 이스라, 안토니오, 유레나! 우리는 서로 손을 들고 ”만세~!”처럼 흔들며 반나절 만의 재회를 기뻐했다. 걸음이 빠른 나와 이스라가 먼저 걷게 되었고 유레나와 안토니오는 후발대로 따라왔다. 이스라는 까미노를 벌써 3~4번이나 걸어본, 트레킹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예전에 한국인과도 같이 순례길을 걸은 인연이 있었다며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길을 걷다 말도 만나고, 소도 만나고, 양도 만났다. 우리는 동물을 각자의 언어로 어떻게 부르는지 이야기하며 잘 되지 않는 발음에 서로 깔깔 웃었다. 소가 너무 가까이 있어서 “Scared”라도 말했는데 사실 소는 별로 안 무서웠다. 그냥 서로 정적이 오면 어색하니까 아무 영단어나 내뱉은 거였다. 그렇게 수다를 떨며 ‘오리손’에 도착했다. 언덕 위 작은 알베르게이자 휴게소. 테라스에 앉아 내려다보는 풍경은 마치 하늘 위 섬 같았다. 이스라가 커피를 사줘서 같이 앉아 안토니오와 유레나를 기다렸다. 생장에서 만난 한국부부도 다시 마주쳤다. 같은 날 출발한 사람들은 어딘가에서 꼭 다시 만나는 것 같았다. 멀리서 유레나와 안토니오가 손을 흔들며 올라왔다. ”여기야~ 얼른 와! “라고 소리치며 그들을 맞았다. 첫날부터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과 함께 걷는다는 게 참 신기했다. 그리고 왠지 뿌듯했다.

오리손을 지나 다시 걷기 시작했다. 피레네 산맥을 넘는 이 길은 순례길 중에서도 난이도가 높기로 유명하지만, 이상하게 전혀 힘들지 않았다. 나는 이스라에게 ”힘내~! “ 이스라는 나에게 ”아미고! “를 알려주었다. 가파른 오르막이 나올 때마다 우리는 서로 ”힘내~! “아미고~!” 하며 장난처럼 외쳤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새벽동안 내린 비 때문에 질척거리는 길과 높은 오르막이 나왔다. 그래도 숨이 턱 막히지는 않았다. 아마도 내가 자꾸 영어로 말할 문장을 생각하느라 그랬던 것 같다. “이 말 영어로 어떻게 하더라..” 몰래 번역기도 돌리고 엉터리 영어를 하다 보니 어느새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