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Day1
론세스바예스의 알베르게는 단 한 곳. 약 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숙소였다. 몇 해 전, 인터넷에서 본 이층침대가 빼곡한 사진 한 장이 내게 순례길의 꿈을 심어줬는데, 그 사진 속 장소가 바로 여기.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의 모습이었다. 자원봉사로 일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체크인을 도와주셨고, 재미있게도 대륙별로 침대 배정이 이루어졌다. 나는 아시아 구역에, 유럽은 유럽대로, 아메리카는 또 아메리카대로. 덕분에 같은 날 출발한 한국인 순례자들을 한자리에서 거의 다 만날 수 있었다.
여자분들에겐 내가 가져온 드라이기를 빌려드리고, 몇몇 분들과 1 유료씩 돈을 모아 세탁기와 건조기를 함께 돌리기도 했다. 우리가 모두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간다는 것, 그 공감대만으로도 묘한 전우애가 생겼다. 군대는 안 가봤지만, 대충 이런 느낌이려나 싶었다. 샤워 후 금발의 외국인 언니가 드라이기가 없어서 핸드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있길래 내 드라이기를 빌려줬다. 사실 이 드라이기, 챙길까 말까 엄청 고민했었는데 정작 나는 한 번도 쓰지 않고 사람들과 친해지는 아이템으로만 쓰고 있다. 아주 만족스러운 선택이다. 하지만 이 드라이기는 며칠 뒤 어딘가 알베르게 나눔 함에 두고 왔다.
내가 배정받은 칸엔 2층침대 두 개, 총 4명이 쓰는 작은 방처럼 생긴 칸이었다. 제주도와, 안양에서 오신 아버님 두 분과 의정부에서 온 남자분 그리고 나까지 이렇게 같은 칸을 쓰게 되었다. 아버님들은 코골이가 걱정된다며 “코 골면 미리 미안하다~” 하시길래 “그럼 코 막죠 뭐~!” 하며 농담도 주고받았다. 내 침대 위층을 쓰게 된 의정부 남자분은 오늘 함께 걸었던 미국 아저씨들과 한국 어머님들의 알베르게 예약을 도와드리는 등 이곳에서 아주 유능한 도우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알베르게 예약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지하에서 지내야 했는데, 구경을 하러 갔더니 벽돌로 된 돔 천장 아래에 엔틱 한 이층침대들이 있었고, 이층 침대에는 사다리가 없었다. 내려오기 어려워하던 어떤 한국인 분에게 외국인 남자분이 “공주님 안기”로 도와주겠다고 했다는 귀여운 에피소드도 있었다.
씻고 일기를 쓰고 있는데, 누군가 “스페인 남자가 널 찾는다더라”는 이야기를 해줬다. 아 이스라! 나는 곧장 다른 층으로 올라가 이스라를 찾아봤지만 만나지 못했고, 대신 그 층에 있던 유럽인 약 50명과 인사만 잔뜩 하고 계단을 내려왔다. ‘이대로 못 만나면 어떡하지..’ 하고 시무룩해져 계단을 내려오는데, 마침 이스라를 만났다! 안토니오와 유레나도 잘 도착한 거 같았다. 그런데 이스라가 말하길, 정강이 상태가 좋지 않아 이번 순례는 론세스바예스에서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오늘 천천히 걸어도 됐을 텐데, 나랑 걸으면서 속도를 맞추다 무리가 간 건 아닐까 나는 걱정스러웠다. 이스라도 많이 아쉬워 보였지만 “난 괜찮아! 저녁때 보자!”며 웃으며 인사했다.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는 식사를 제공했지만, 나는 예약하지 않았기에 생장에서 사 온 컵라면, 과일, 요구르트를 저녁식사로 챙겨 왔다. 혼자 식당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니, 외국인들은 기타를 연주하거나 직접 요리를 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저녁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스라와 안토니오가 식당으로 내려왔다. 우리는 셋이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서로 오늘 코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스라는 내가 잘 걷는다고 칭찬해 줬다. 나는 내일부터 진짜 배낭을 메고 걸어야 한다고 걱정했는데 “너라면 잘할 수 있어”라며 계속 용기를 줬다. 이스라는 내내,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연락하라고, 순례가 끝나고 바르셀로나나 마드리드에 오게 된다면 자기가 갈 테니 꼭 만나자고 했다. 나는 왓츠앱을 쓰지 않다 보니, 이스라는 나와 연락하기 위해 인스타그램 계정까지 만들었다. 이 정도면.. 쪼꼬만 애가 낯선 땅에서 영어도 잘 못하는데 혼자 한 달을 걷는다고 생각하니 정말 걱정스러웠을 것이다.
밥을 먹다가도 이별이 아쉬워서 정적이 자꾸 흘렀다. 안토니오는 영어를 잘하지 못해 대화를 많이 못 나누었지만 종종 과묵한 미소에서 아쉬움이 보였다. 나는 일기장에 둘의 얼굴을 그리고, 한국어로 편지를 써서 선물했다. 그리고 이스라에게 ”나에게도 한마디 써줄 수 있어? “하고 일기장을 건넸다. 이스라는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한 글자 한 글자 조심스럽게 적어주었다.
“Fue un placer conocer la estrella más luminosa del Camino. Buen Camino!”
“까미노의 빛나는 별을 만나서 반가웠어요. 부엔 까미노!”
번역을 읽는 순간, 눈물이 났다. 첫날부터 이렇게 좋은 인연을 만났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맙고 행복했다. 외국인과 순례길을 함께 걷고 친구가 될 줄도 몰랐고, 내가 25km의 여정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란 것도 예상하지 못했다. 우린 오늘 이별했지만, 나는 언젠간 꼭 테네리페에 놀러 가겠다고, 너희도 꼭 한국에 놀러 오라고 인사했다. 한참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다가, 애써 웃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언젠간 꼭 다시 만나자,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