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 많은 나의 첫 모험

산티아고 순례길 Day2

by 재인

론세스바예스에서 하루가 지나고 오늘은 수비리까지 가는 날이다. 알베르게가 좀 추워서 중간에 일어나 경량패딩을 입고 잤다. 한국에서는 반바지 반팔이 아니면 절대 못 자는데, 춥긴 추웠다보다. 어제 무려 피레네 산맥을 넘었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배낭을 들고 걸으니, 오늘도 나에겐 도전인 날이다. 신발을 신으러 1층으로 내려갔는데 빨간색 모자를 쓰신 한국인 분을 만나서 같이 출발하게 되었다. 이 분은 세계여행 중이셨는데 가방이 무려 12kg이었다. 4kg 가방을 들고 가는 것도 도전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배낭이 좀 가벼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오전 8시였다. 헤드라이트에 의지해 조심조심 걸음을 내디뎠다. 밤의 흔적이 남아있는 공기는 차고, 나뭇가지 그림자는 괜스레 날 긴장하게 했다. 조심스레 걷다 보면 어느새 하늘이 아주 천천히 분홍빛으로 번져오기 시작한다. 밤공기를 가르고 들어오는 새벽빛이 낯설었던 모든 것들을 조금씩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때부터야 조금 무섭게 느껴졌던 풀더미와 나무들이 아침햇살을 맞이하러 나온 친구들처럼 느껴졌다. 순례길에서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되는 모양이다.


풀숲을 지나 한참을 걷다 보니 눈앞에 넓고도 평화로운 들판이 펼쳐졌다.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누운 풀 위로 내려앉아, 들판은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 위로 말 몇 마리가 여유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말들의 목에 달린 방울이 천천히 울린다. 띵- 띵- 종소리가 이 넓은 들판 위로 퍼져간다. 그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어쩌면 이 순간을 보기 위해 걷기를 시작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배낭에 걸려있는 조개껍데기다.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옛날부터 이 길을 걸은 수많은 순례자들이 달고 다녔던 순례자의 표식이다. 과거에는 이 조개가 순례를 하며 물이나 음식을 담는 그릇이 되기도 했다. 다른 나라 다른 인생들이 이 길 위에 모여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 우린 언어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속도도 다르다. 하지만 조개 하나로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서로 웃으며 “Buen Camino!”를 외친다. 이제는 과거의 순례자의 상징이 아니라 여기서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표식 같다.

수비리에 가까워질수록 길은 눈에 띄게 거칠어졌다. 그동안 오르막은 좀 있었지만, 비교적 평탄했던 길이 끝나고, 갑자기 날카로운 바위들이 가득한 가파른 내리막이 시작됐다. 여기서 한 번 미끄러지면, 그야말로 순례길이 물 건너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험한 구간이었다. 전날 이 길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걱정이 앞섰다. 등산 폴대가 꼭 필요하다는 사람도 있었고, 그냥 조심히 걸어도 괜찮다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폴대가 없었는데, 그냥 한 번 몸으로 부딪쳐 보기로 했다. ‘안되면.. 기어서 내려가자..’

그런데 막상 그 바위 길에 발을 디뎌보니,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조심스럽게 균형을 잡으며 내려가던 발걸음에 점점 속도가 붙었고, 바위와 바위 사이를 넘나드는 그 순간마다 축지법을 쓰는 거 같은 느낌이 짜릿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수비리에 도착해 버렸다. 돌아보니 역시나 겁을 너무 크게 먹었던 거였다. 생각만으로는 끝이 없고, 예상은 언제나 과장이 섞여있는 것 같다. 해보기도 전에 “어려워”, “위험하대”라는 말들에 휘둘리다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한 몇몇 일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하지만 몸을 움직여 직접 경험해 보면 어렵고 무섭게 들렸던 일들이 정작 별거 아닐 때가 많다. 오히려 그 과정을 통해 새로운 재미를 발견하기도 하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 해내는 나를 만나기도 한다. 수비리로 가는 이 내리막 길도 그랬다. 누군가에겐 어려웠을 수 있겠지만, 나에겐 용기를 내본 덕분에 스스로 칭찬해 줄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