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Day2
수비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은 마을이었다. 갈색 지붕에 하얀 벽의 집들은 생장에서 봤던 건물들과 비슷했지만, 창문마다 형형색색 꽃들이 가득 피어있었다. 마을 입구에는 잔잔한 계곡이 흐르고 있었고, 그 위로는 돌다리가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게임 젤다의 전설에 나오는 하테노 마을 같았달까. 지친 몸을 이끌며 당장이라도 계곡에 뛰어들고 싶었지만 개운하게 마을을 돌아보고 싶어서 꾹 참고 알베르게로 향했다. 알베르게 사장님은 시크한 여자분이었는데 빨래를 1 유료에 해주시는 천사분이셨다.
도착하자마자 후다닥 씻고 무릎과 발목에 근육통완화 크림을 발랐다. 아직 다리에 무리가 온 것은 아니지만 미리 준비하는 플라시보 효과랄까. 그냥 씻고 나오면 바르게 된다. 반바지를 입고 밖으로 나왔더니 근육통완화 크림 때문에 서늘한 바람이 다리를 스쳤다. 아까 입구에서 찜해두었던 계곡 앞 잔디밭에 앉아 햇볕을 쬐며 광합성을 했다. 잔디에 누워 낮잠을 자던 사람들도 있었다. ’ 여유라는 게 이런거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나에게 다가와 돌을 던져달라고 졸랐다. 위험하지 않게 조그만 돌을 골라 던져주면 다시 얼굴만 한 큰 돌을 물고 와선 던지라고 눈을 부라렸다. 큰 돌을 입으로 잡을 때마다 들리는 딱딱 소리가 마음이 아파서 옆에 있던 대만 아저씨한테 강아지를 넘겨주고 나는 강아지를 피해, 도망쳐 계곡 건너편 통나무에 앉아 일기를 썼다.
마을을 둘러보았지만, 너무 작아서 몇 바퀴만 돌아도 끝이 났다. 문제는, 하필 오늘이 무슨 날인지 슈퍼도 일찍 문을 닫고 식당들도 전부 영업을 하지 않는 날이었다. 좁은 마을이라 그런지 계속 마주치는 한국인 순례자분들이 있었고, 그중 한 분이 마을 제일 끝에 유일하게 문을 연 식당을 알려주셨다. 그곳에서 나는 스페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메뉴 델 디아(Menú del Día)’를 주문했다. 애피타이저, 메인요리, 디저트까지 3코스로 구성된 오늘의 정식메뉴인데, 보통 10-15 유료 정도로 저렴하면서도 양이 푸짐하다. 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한 외국인 아저씨가 다가와 합석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우리는 그렇게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콜트. 올해 65살인 스위스인이었다. 푸른 눈에 하얀 수염을 가진 모습이 꼭 산타할아버지를 닮았다. 같이 합석을 했지만 분위기는 많이 어색했다. 나는 이런 어색한 분위기가 왜 이리 견디기 힘든지! 속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애피타이저가 나왔다. 샐러드가 코끼리가 먹어도 배부를 만큼 양이 많았다. ‘우와 진짜 푸짐하다..‘라고 생각하며 콜트 접시를 봤는데 애피타이저로 파스타를 시켜서 파스타 1.5인분이 나왔다. 콜트도 이게 애피타이저가 맞냐고 하며 어깨를 으쓱하는데 너무 웃겨서 어색했던 분위기가 많이 누그러진 것 같았다. “스위스 하면 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하잖아요!”라고 묻자 콜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내둘렀다. 아마 그도 그런 이유로 스위스를 벗어나 트레킹을 즐기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콜트는 한국어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며 나에게 키보드를 보여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휴대폰 키보드를 보여주며, 일기장 한쪽에 ‘반가워요 콜트!’라고 적어 건넸다. 그는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소중히 접어 지갑에 넣으며 미소 지었다.
저녁을 배불리 먹고, 하루를 마무리하러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알베르게 문을 조용히 열고 살금살금 계단을 올라 방 앞에 서서 조용히 문고리를 돌리니 아직 이른 저녁인데도, 방 안은 이미 불이 꺼져있었다. 2층 침대 위에는 누군가 이미 잠들어 있었고, 1층에서는 다른 순례자가 나를 향해 조용히 미소 지으며 ‘쉿’하고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그 짧은 제스처와 미소 하나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낯선 사람들과 함께 밤을 보내는 알베르게 생활이 당연히 불편하지만, 모두가 조금씩 그 불편을 감수하며 배려하며 하루를 함께 보낸다. 나도 조심스럽게 세면도구를 챙겨 양치를 하고 살금살금 침낭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정말 3초도 되지 않아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