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퀘스트 : 팜플로냐를 향하여]

산티아고 순례길 Day3

by 재인

오늘은 처음으로 큰 도시, ‘팜플로냐’에 도착하는 날이다. 어제 누군가와 함께 출발했던 터라, 오늘 혼자 걷는 발걸음이 벌써부터 쓸쓸하게 느껴졌다. 이른 아침, 높은 갈대밭 사이를 걷고 있는데, 어딘가에서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길엔 아무도 없었고, 서늘한 새벽공기와 겹쳐져 그 소리는 괜히 더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숲으로 들어서는 길에서도 계속 흐느끼는 소리가 났고, 나는 괜히 마음이 조급해져 걸음을 재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앞쪽에 누군가 걷는 모습이 보였다. 배낭 옆에 우쿠렐레를 단 채로 걷고 있던 그녀는 캐나다에서 왔다는 ‘쉘’이었다. 흐느끼던 소리는 귀신이 아닌 쉘이 흥얼거리던 목소리였다. 음악을 전공했다는 쉘의 말에 실용음악을 전공한 나는 반가움이 느껴져 이것저것 자연스레 대화를 나눴다. 쉘은 이 길에서의 경험을 모아 노래로 만들어 앨범을 내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이 여정이 나에게도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창작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보며 피식 웃게 됐다.


어제 내가 수비리 계곡에서 강철이빨 강아지를 (떠) 넘겨주었던 대만아저씨도 다시 만났다. 그의 이름은 ’ 빈센트‘였는데 반 고흐의 이름을 떠올리며 기억해 두었다. 그는 내게 “너 이름이 뭐였지?”라고 물었고, 내가 다시 이름을 알려주자 “난 올드 보이라서 기억력이 안 좋아~”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빈센트와 나란히 걷던 중 이번엔 클럽 같은 ’둥- 둥-’하는 베이스 소리가 들려왔다. 숲 속 오두막에 뒷마당 같아 보이는 공간에서 젊은 남자와 여자 둘이 디제잉 기계를 두고 음악을 틀며 춤을 추고 있었다. 지금이 오전 9시도 채 안된 아침인데, 밤새 술을 마신 건지, 아침부터 파티를 연 건지 알 수 없는 장면이었다. 숲 속 조용한 순례길, 서늘하고 축축한 새벽 공기, 그리고 그 가운데서 들려오는 클럽음악과 술에 취한 듯 춤추는 젊은 남녀의 모습이 이상하리만치 공포영화 같았다.

그들을 지나쳐 또다시 걷고 있는데 앞서 가고 있던 그의 친구와 마주쳤다. 빈센트는 동키서비스를 이용해서 가볍게 걷고 있었지만, 친구는 묵직한 배낭을 메고 있었다. 빈센트가 재잘재잘 말을 걸자 친구는 배낭을 으쓱 들고 빈센트를 강렬하게 쳐다보며 막 뭐라고 말을 했다. ‘사내가 그 정도도 못하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중국어를 못하는데도 순간 그 말이 귀에 무슨 뜻인지 들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따라 팜플로나 퀘스트를 완수하기 위해 걸어가다 여러 NPC들을 만나는 거 같다. 다들 자기만의 캐릭터나 대사 하나씩은 꼭 들고 있는 것 같아서, 흥미진진하다.


그렇게 5km.. 10km.. 20km 가까이 걸어 팜플로냐에 다다를 즈음엔 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반복되는 풍경에 길도 조금 지루해지던 찰나, 어제 식사자리에서 만났던 콜트를 다시 만났다. 콜트는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는 먼저 손을 흔들며 “재인? 오늘 어때? 힘들지 않아?”라고 아는 체를 해주었다. 별일 아닌 인사 한마디였는데, 그 순간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찡하고 감동적이었다. 나는 힘이 난 듯 씩 웃으며 ”나는 괜찮아! “라고 활기차게 대답했다. 팜플로냐는 큰 도시여서 그런지 분명 시내로 들어온 줄 알았는데도 중심까지는 한참을 더 걸어야 했다. 시내에 들어선 지 한 시간이 넘어서야 마침내 거대한 성벽이 눈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성벽을 지나서는, 정말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성벽 밖은 분명 도시였고, 공원도 있었고,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특별함은 없었다. 그런데 성벽을 넘자마자, 마치 경계선을 통과하듯 완전히 새로운 공간이 펼쳐졌다. 좁고 오밀조밀한 골목들, 그 위에 빼곡하게 겹쳐진 알록달록한 스페인 특유의 건물들, 그리고 어디선가 당장이라도 축제가 시작될 거 같은 들뜬 분위기. 햇살조차 다르게 느껴졌다. 마치 게임 속에 들어온 듯한 기분. 현실과는 살짝 어긋난 이질감이 오히려 설레게 했다. “바로 여기가 스페인이구나”


오늘은 1인실을 예약했다. 앞선 프랑스여행까지 합치면 약 열흘 만에 혼자 자는 밤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생각보다 큰 침대 앞에서 괜히 조심스러워져서, 큰 침대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처럼 침대 구석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걸치듯 기대앉았다. 오늘은 불도 내 마음대로 껐다 켤 수 있거, 씻는 것도 서둘러 씻지 않아도 된다. 열흘 만에 아무도 없는 이 작은 방에, 입꼬리가 저절로 씰룩였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였다. 곧 ‘이제 뭐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편한 이 공간에서 이상하게도 외로웠다. 만약 오늘도 순례자 알베르게에 머물렀다면, 씻느라 줄을 서고 불 꺼질 시간에 맞춰 부랴부랴 정리를 하더라도, 오늘 하루도 뚜벅뚜벅 걸어낸 누군가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서로에 대한 말없는 공감이 되었을 텐데. 오늘의 낯선 여유가 꼭 안 좋다는 건 아니지만, 좀 허전하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