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연박

산티아고 순례길 Day4

by 재인

팜플로냐에 들어선 뒤로, 같은 날 출발한 한국인 순례자들과 점점 가까워졌다. 걷는 속도는 제각각이었지만, 길에서 마주치게 된다면 원래 알고 지냈던 사이인 마냥 반가웠다. 오늘 저녁은 론세스바예스에서 만난 한국인 인연들이 다시 모이는 자리였다. 나와 같은 칸을 썼던 제주 아버님이 지내시는 에어비앤비에서, 다 같이 요리를 해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


참석자는 무려 열한명. 론세스바예스에서 나와 한 칸을 썼던 제주아버님과 안양아버님, 미국에서 오신 어머님 세 분, 안양에 사는 젊은 부부, 혼자 온 남자 세분 그리고 나. 한자리에 모인 얼굴들은 낯설지 않았고, 반가움은 웃음과 수다로 곧장 번졌다. 식사를 준비하러 마트로 향했지만, 팜플로냐에 도착한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스페인의 일요일은 무조건 쉬는 날. 대형 마켓은 모두 문을 닫았고, 결국 모두가 구글맵을 뒤져 유이하게 열린 중국 마켓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 우리 중 직업이 셰프인 분이 계셔서 우리는 모두 신나 이것저것 셰프님께 여쭤보며 재료를 쇼핑했다.


주방에선 어머님들과 셰프님의 눈치를 보며 다들 “제가 뭐 도울 거 없을까요..?”라고 말하며 주위를 서성였다. 마늘 가는 일엔 무려 네 명이 동원되기도 했다. 얼마 안 되는 재료로 시작된 요리는, 이내 우당탕탕 큰 테이블로 옮겨졌다. 큰 테이블에 모두가 조금씩 낑겨앉아 우리는 각자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했다. 그 자리에서는 하나 둘 인연이 밝혀지기도 했는데, 제주아버님과 미국 어머님 한 분이 학창 시절 동창이었고, 젊은 부부 중 언니가 산티아고 카페에 남긴 질문에 안양아버님이 댓글들 단 인연도 있었다. 그때는 서로를 몰랐지만, 지금은 같은 테이블에서 웃고 있는 사이라는 사실이 신기했다. 비록 걸은 날은 고작 3일이지만, 이 짧은 시간 안에 쌓인 에피소드와 감정들은 마치 벌써 산티아고에 도착한 것처럼 모두의 마음을 꽉 채웠다. 식탁 위 음식보다 많은 이야기와 웃음 그리고 낯설지 않은 인연들이 가득했다.

큰 도시에서는 연박을 하며 지친 몸에게 쉼을 주거나 관광을 하기도 한다. 며칠 뒤 있을 로그로뇨에 와인축제 날짜를 맞춰서 가기 위해 나도 팜플로냐에서 연박을 하며 관광을 하기로 했다. 팜플로냐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 정도 가면 ‘산 세바스티안(San Sebastián)‘이라는 도시에 갈 수 있다. 산 세바스티안이란 도시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에 위치한 작고 아름다운 해안도시로, 세계에서 미슐랭이 제일 많은 도시다.


버스터미널에서 나와 제일 먼저 내 눈과 인사한 건 쨍한 햇살이었다. 팜플로냐가 ‘진짜 스페인’이라고 느꼈다면 산 세바스티안은 ‘진짜 진짜 스페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대서양과 맞닿은 작은 바스크 도시는 태양, 바다, 그리고 여유. 여름 그 자체였다.

유명하다는 핀초스도 먹어봤다. 바스크식 타파스로, 맥주 안주로 딱 좋은 핑거푸드다. 그런데 타파스는 생각보다 먹기 위한 난이도가 높았다. 테이블에서 메뉴판을 보고 주문하는 방식이 아니라 북적거리는 바 안쪽으로 들어가 손짓으로 하나하나 직접 골라야 했다. 스페인어도 모르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주문해야 할지 몰라 눈만 계속 빙빙 돌렸다. 결국 첫 번째 식당은 포기. 더 조용한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두 번째 식당에는 사람도 많이 없고 직원도 잘생겼었다. 내가 손짓으로 이것저것 주문하며 테이블을 왔다 갔다 하자, 그는 웃으며 인기 많은 메뉴를 추천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용기를 내다보니, 어느새 작은 테이블 위, 색색의 핀초스 접시들이 하나둘 쌓여갔다. 처음엔 이런 어색한 상황에 긴장했지만, 한 입 한 입 먹을수록 핀초스와 맥주는 찰떡콩떡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용기 내서 주문한 나를 칭찬하며 건배!


해변으로 나와 바라본 산 세바스티안의 풍경은 한 폭의 사진 같았다. 망설임 없이 바다로 뛰어드는 아이들, 고운 모래 위에 누워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 비치볼을 주고받는 연인들. ‘이 사람들.. 일은 안 하나?’싶을 만큼 모두가 느긋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그 순간, 몇 년 전 요시고 사진전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떠올랐다. 햇빛, 파도, 그리고 아주 천천히 흐르는 시간 같은 지금 이곳. 그 사진들 속 한 장면 같았다. 소리도, 파도도, 사람도 모두 느긋했고, 나도 그 여유로움 속에서 발끝에 잔잔한 파도를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