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Day5
달콤한 연박을 뒤로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푸엔테 라 레이나까지 약 24km를 걸어야 하는 날이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알베르게를 나서자, 눈앞에 펼쳐진 건 산 아래 드넓게 펼쳐진 평야와 끝없이 이어지는 해바라기 밭이었다. 하지만 해바라기들은 모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철이 지난 탓인지,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에게 ‘이제 그만 놀아~’라고 했을 때 풀이 죽는 아이들처럼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만약 해바라기 철에 걸었다면 얼마나 화사했을까? 사방이 노랗게 펼쳐지고 나는 그 안을 가로질러 걸었겠지? 하지만 무척 더웠을 것이다. 결국 내가 언제를 선택해 오더라도,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긴 언덕길을 오르다 보니 오늘의 하이라이트 ‘용서의 언덕’이라는 곳에 도착하게 되었다. 사실 나는 ’ 용서‘의 언덕을 ’ 용사‘의 언덕으로 착각해서, 머릿속엔 갑옷을 입은 기사가 드래곤이나 뭐 그런 거 잡으러 가기 전에 마음을 다잡는 신성한 장소일까?라는 생각을 하며 비장하게 걸었다. 도착하고 나서야 이 언덕이 ’ 용서‘의 언덕이라는 걸 알고 빠르게 내가 용서받을게 뭐가 있다 머리를 굴렸다. 미리 내가 순례길에 대한 공부를 했다면, 오늘 이 언덕을 넘으며 나의 실수들과 잘못들을 스스로 조금이나마 용서하는 자리였을 텐데. 순례길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이 상황을 용서를 구해야 했다. 하지만 용서고 뭐고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 감상에 젖을 틈도 없이 거의 날아갈 뻔했다.
푸엔테 라 레이나는 노란빛 돌담과 따뜻한 색의 건물들, 그리고 차분한 분위기를 가진 마을이었다. 애니메이션 라푼젤에서 라푼젤과 유진이 등불 축제를 보러 왕국에 입성했을 때의 그 장면이 생각났다. 건물 색감을 보면 젤다의 전설에 나오는 겔드 마을 같기도 했는데, 내가 왜 자꾸 젤다 이야기를 하냐면, 여행 오기 전 거의 1년을 매일 밤 젤다만 했다. 심지어 순례길 배낭에 닌텐도를 넣으려다가 부모님이 말려서 못 가져왔다. 이런 게 게임 중독이 아닐까 싶다. 아직도 매일밤 젤다 OST를 들으며 잠든다.
오늘은 처음으로 미리 예약한 곳이 아닌, 워크인으로 무니시팔(municipal) 알베르게에 묵기로 했다. 무니시팔 알베르게는 지방 자치 단체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예약이 안되고, 선착순으로 도착한 순례자에게 침대를 배정해 준다. 다행히 침대를 배정받고 짐을 내려놓은 뒤, 샤워실로 향했다. 처음으로 공용샤워실이었다. 물론 칸마다 문은 있었지만, 가끔 수건 하나만 두른 아저씨가 문을 열고 나오면 눈을 슬쩍 돌리며 “괜찮은 척”을 했다.
샤워를 마치고 손빨래를 한 뒤, 뒷마당에 나가 빨래를 널었다. 정원에는 정돈된 잔디 위에 앉아 햇볕을 즐기는 순례자들, 테이블에 앉아 간식을 먹는 사람들, 그리고 그 틈을 지나는 귀여운 고양이들이 있었다.
레이나 마을을 둘러보다가 얼떨결에 작은 성당에 들어가게 됐다. 지금까지 봐온 알록달록하고 웅장한 성당들과는 달랐다. 여긴 어둡고, 꼭 필요한 곳에만 조명이 켜져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예수상 하나가 조용히 놓여있었다. 오히려 큰 성당을 마주했을 때 보다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화려한 곳에선 느낄 수 없던 정적. 지금도 이 성당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방명록에도 글을 남겼다. “세상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기를”
마을 끝 다리 밑에는 강과 함께 어우러진 작은 집들과 예쁜 화분들, 잔디밭이 있었다. 이 공간이 너무 좋아서 알베르게에 돌아갔다가 일기장을 챙겨 다시 찾아왔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잔디를 쓰다듬으며, 물소리와 바람소리를 들으며 일기를 썼다. 강에 비친 윤슬이 정말 예뻤다. 구름에 잠시 가려졌다가 다시 햇살이 비칠 때, 그 빛이 물 위에서 반짝이는 순간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벅차올랐다. 순례길이 이런 거구나 싶다. 반나절 걷고 도착한 작은 마을에서, 발을 풀고 쉬며 멍하게 있는 시간. 지금 이곳에서 아무 생각 없이 멍을 때려도 전혀 초조하지 않다. 내일은 배낭 하나만 메고 또 다른 마을로 가니까. 이 좋은 걸 왜 망설였을까? 더 넓은 세상이 보고 싶다. 잔디가 이렇게 부드러운 줄은, 내가 스스럼없이 맨발로 풀을 쓰다듬게 될 줄은, 그때의 나는 몰랐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