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순례길 Day7
아직 걷기 시작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어느새 순례길 고수가 된 기분이었다. 전날, 충전기와 침낭, 세면도구만 남기고 배낭을 미리 다 싼다. 내일 입을 옷을 미리 입고 잠드는 것도 어느새 익숙해졌다. 아침 7시 30분쯤 일어나 침낭을 정리하고, 양치를 하고, 배낭을 챙기면 어느덧 8시. 해가 아직 뜨지 않은 어스름한 시간에 길을 나선다. 한 시간쯤 걷다 보면 첫 번째 마을이 나오고, 그곳에서 커피 한잔과 함께 아침을 먹는다. 평소엔 아침을 잘 챙겨 먹지 않았는데, 요즘은 활동량이 많아져서인지 아침 식사를 거를 수가 없다. 대부분 ‘또르띠야’를 먹는다. 치즈케이크처럼 생긴 두툼한 계란말이인데, 아침으로 든든해서 딱 좋다. 아침을 먹고 20km 정도 걷다 보면 마을에 도착이다. 걷디가 마을이 보여도 절대 ‘거의 다 왔다’라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 마을이 보는 순간부터 희망고문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문득, 혼자 제주도 여행을 갔던 기억이 났다. 그때도 산책 겸 숙소 앞을 걷기 시작했는데, 약 30걸음마다 깃발이 날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호기심에 그 깃발들을 따라가다, 어느새 제주 올레길 8코스를 반나절동안 걷고 있었다. 해가 져버려 더 걷지 못하고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와야 했다. 그날 걷던 그 길이 참 좋았다. 바다만 나오는 게 아니라, 산도 나오고 마을도 지나고 박물관도 있고. 무료로 걷기만 하는데도 이렇게 행복하고 좋을 수 있구나 싶었다. 아마 그때 결심했던 것 같다 ‘언젠간 꼭, 순례길을 걸어야겠다’고
생장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힘들면 그냥 버스 타고 목적지로 가버리자. 시도만 해보는 거야’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내가 지금 순례길을 웃으며 걷고 있다. 이렇게 잘 해낼 줄, 이렇게 씩씩하게 걸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한 번도 이렇게 무거운 짐을 들고 오래 걸어본 적이 없는데, 그 무게를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내 모습이 너무 기특했다. 나는 매일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오늘 그걸 가장 실감했던 순간이 있다. 숲 속에서 등산처럼 꽤 긴 오르막길이 나왔는데 이상하게 몸이 가뿐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 ‘앞질러볼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앞서 걷던 순례자들을 하나 둘 제치고 내 속도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숨도 안 차고 다리도 무겁지 않았다. 몸이 가뿐하고, 공기는 상쾌했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그 숲에 있던 어떤 귀신에게 접신한 줄 알았다.
‘산솔’에 도착해서도 기분은 계속 좋았다. 일단 하늘이 너무 예뻤다. 어렸을 때 크레파스로 하늘을 그려보라고 하면 항상 그리던 하늘색 바탕에 조각구름들이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구름이 흐르지 않고 콕하고 박혀있으니 세상이 멈춘 것만 같았다. 알베르게 테라스에서 일기를 쓰며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요즘 내가 모든 순간에 매번 ‘감사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긴 건 아닐까 싶었다. 모든 순간이 소중하고 아까우니까, 혹시 내가 흘려보낸 시간이 있지는 않을까 불안해졌다. 순례길은 매일 정해진 도착지를 향해 걷는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10km밖에 안 걸었네’, ‘얼마나 더 남았지?’ 같은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렇게 도착에만 집중하다가 막상 도착해 버리면 ‘아차’싶은 마음이 든다. 과정을 충분히 누리지 못한 채 도착해 버렸다는 아쉬움. 이 길이 너무 좋고 이 시간이 너무 행복해서 나는 자꾸만 지나간 순간들을 벌써부터 미련하게 붙잡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