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Day8
로그로뇨 와인 축제를 보기 위해 아주 이른 새벽어둠 속을 걸어 나왔다. 아직 하늘이 까맣게 잠들어 있는 시간, 언덕길을 오르는데 바로 옆 마을인 토레스 델 리오가 한눈에 들어왔다. 오밀조밀한 불빛들이 어둠을 뚫고 모여있는 그 풍경은 작은 마을이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오묘했다. 깜깜한 세상 속에, 이런 허허벌판 대지 속에 마을이 존재하고 누군가의 온기가 모여있다는 게 마음을 오묘하게 했다. 한참을 걷다가 언덕 하나를 넘자, 이번엔 주황빛 구름이 타오르듯 떠 있었다. ‘설마 벌써 해가 뜨는 건가?’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로그로뇨 도심의 불빛이 반사되어서 생긴 광경이었다. 어둠을 밝히는 도시의 불빛이 구름을 물들이는 모습은 묘하게도 초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얼마나 많은 빛이 보여야 구름조차 붉게 만들 수 있을까? 신세계를 발견한 느낌이랄까? 그 도시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낯선 기분도 들었다.
도시의 입구가 보이기 시작한 건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큰 도시로 진입하는 길은 길고, 익숙지 않은 피로가 찾아온다. 눈에 계속 그 도시가 보이고 내가 그 도시 안을 걷고 있는데도 도착지에는 다다르기 힘든 그 느낌. 그래서 큰 도시에 가기 전엔 항상 마음을 비장하게 먹는다. 그런데 점점 도심에 가까워질수록 거리의 사람들이 많아지고 많아지고 더 많아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거리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종종 배낭을 메고 있는 나에게 ‘Buen Camino!!’를 외쳐주기도 했다. ’ 바로 이런 게 스페인 축제구나!!!‘ 나는 배낭 메고 땀을 뻘뻘 흘리며 꼬질한 모습으로 이제야 로그로뇨에 왔는데! 그 에너지에 압도되어 버렸다. 후다닥 알베르게에 배낭을 내려두고 축제를 즐길 준비를 완료했다.
와인 축제를 즐기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흰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티셔츠들은 그냥 단순한 ‘흰 티셔츠’였지만, 어떤 사람은 얇은 천 위에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고, 어떤 사람은 반쯤 찢어서 나름의 스타일로 커스텀을 해 입고 있었다. 처음엔 ‘왜 다들 옷을 맞춰서 입었지?’하고 의아했었는데, 흰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레드와인을 마음껏 뿌려도 괜찮았던 것이다. ‘나는 축제를 즐길 준비가 되었어!’라는 일종의 신호였다. 그렇게 서로 와인을 뿌리며 웃고 즐기다 보면, 어느새 흰 티셔츠는 보랏빛으로 물든다. 처음엔 사람도 너무 많고, 텐션도 너무 높아서 당황했지만, 나도 어느새 술이 한두 잔 들어가니 이 축제가 마냥 신나기 시작했다.
와인을 한 잔 하러 식당을 찾기 위해 어마어마 한 인파를 뚫고 걷던 중이었다. 복잡한 거리 사이로 같은 시기에 순례길을 걷고 있는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중 누군가가 나를 향해 ’Hey! Camino girl!!!’하고 반갑게 인사했다. 외국인이 나를 이렇게 반가워해 주다니, 순례자들과 길에서 마주칠 때마다 열심히 인사하곤 했는데, 이렇게 나를 기억해 주다니 왠지 뿌듯했다. 이제는 주문도 척척 할 수 있는 타파스바에 앉아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영화 ‘에밀리, 파리에 가다 ‘에 나오는 필립핀 르로이-뷔리우처럼 우아한 금발 언니가 타파스를 추천해 주며 나에게 슬쩍 윙크를 건넸다. 이런 친절한 사람들 덕분에 나는 축제를 더 깊이 즐길 수 있었다. 행복한 에너지가 차곡차곡 쌓이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와인이 담긴 작은 가죽 주머니를 어깨에 메고 다녔다. 그걸로 와인을 마시기도 하고, 축제 참가들에게 뿌리며 놀기도 했다. 함께 동행했던 분이 스페인 남자 무리에게 ’그 와인 주머니 어디서 살 수 있어?‘라고 묻자, 그중 한 남자가 말없이 자기 주머니를 그대로 그분 목에 걸어주었다. 얼마나 자연스럽고 망설임 없는 친절이던지.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감동했고 덩달아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나중에 길을 걷다가 그 무리를 다시 마주쳤을 때는 또 다른 남자가 이번엔 내 목에 자기 주머니를 걸어주었다. 그 주머니 덕분에 나도 당당히 ’ 축제를 즐길 준비가 되어있어!‘라는 느낌을 받았다. 거리 한가운데에서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웃으며 종종 사람들이 내 와인 주머니를 보고 윙크를 하기도 했다. 작은 물건 하나가 나라를 신경 쓰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문득 오전엔 광활한 대지를 걸으며 고요했고, 오후엔 광장 한가운데서 와인을 마시며 즐겼다. 이렇게 하루 안에서도 전혀 다른 감정들을 겪었다. 이런 게 바로 순례길의 묘미일까? 시간이 가고 걸음을 옮긴다는 게 하루하루 아쉬운 느낌이 든다. 정해진 거리 없이 멈추고 싶은 마을에서 시간을 보내고, 또 어떤 순간은 낯선 사람들과 새로운 추억을 쌓는다. 자연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하는 오전의 고요함과, 있는 그대로를 즐길 수 있게 해주는 오후의 유쾌함이 서로 더해지며 순례길 위에서 나는 더 다채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