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Day8
지금까지 함께 걸어온 한국 사람들이 로그로뇨에 연박을 하게 되었다. 모두와 잠시 떨어지게 된 하루였다. 순례길을 떠나기 전엔 ’ 힘들면 무조건 쉬거나 그만둔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어느새 씩씩하게 걸어온 내게 ’연박‘이라는 건 더 이상 선택지에 없었다. 그냥 오늘도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오늘의 목표는 무려 30km. 애매한 거리에 숙소가 몰려 있어서, 조금 무리를 해야 했지만, 어차피 20km를 걷든 30km를 걷든 결국 다 똑같이 힘든 거 같았다. 제일 중요한 건 마음가짐이었다.
다만 오늘 좀 힘들었던 건, 물을 안 챙겨 왔다는 것. 걷다 보면 의외로 무를 많이 마시지는 않게 되는데, 그 이유는 단순했다. 화장실. 마을 하나를 지나면 그다음 마을까지 5~6km 정도는 떨어져 있다 보니, 물을 많이 마시면 곤란한 상황이 생길 수 있었다. 그리고 물도 결국 짐이었다. 그래서 작은 생수 하나만 들고, 중간중간 바(Bar)에서 쉬면서 해결하기로 했다. 처음엔 ‘바’라고 하길래 술 마시는 그 바?라고만 생각했는데 순례길의 바는 정말 순례자들의 오아시스였다. 맥주, 커피, 빵.. 무엇보다 ’ 세요(도장)‘도 찍을 수 있고, 깨끗한 화장실까지 갖춘 쉼터였다. 급똥은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었지만, 지금까지 걷는 동안 화장실로 고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도 순례길은 내 고정관념을 깼다. 그렇게 나헤라(Nájera)를 향해 걷는 길. 마지막 마을에서 나헤라까지는 약 10km 정도가 남아 있었다. 마지막 10km는 이상하리만큼 목이 너무 말랐다. ‘목이 마르다’라고 인식한 순간부터는 정말 입이 쩍쩍 갈라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마지막 마을을 떠난 지 한참이 지났고, 나는 힘 없이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던 중, 눈앞에 믿기 힘든 풍경이 나타났다. 길가 한쪽에 냉장고가 떡하니 놓여있었던 것이다. 아이스크림, 맥주, 음료수가 차갑게 가득 들어있었고, 위에는 작은 박스가 있었다. 무인 판매였다. 소매치기를 항상 조심하던 유럽에서 무인판매라니! 이것도 순례길의 작은 묘미였다. 지나가던 순례자들은 냉장고 문을 열고, 맥주를 꺼내 벌컥벌컥 마신 뒤, 말없이 바구니에 돈을 넣고 다시 길을 걸었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진심으로 그 냉장고는 그날의 순례자들을 여럿 구했다.
나헤라에서는 도네이션 알베르게에서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숙박비는 정해진 금액 없이, 원하는 만큼의 금액을 기부하는 방식이었다. 알베르게는 방 없이 네 개의 공간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빨래하는 곳, 주방, 샤워실과 화장실, 그리고 침실. 마치 컨테이너를 이어 붙인 듯 단출했지만, 필요한 것들은 다 갖춘 곳이었다.
샤워를 하고 빨래를 마당에 널어둔 뒤, 침대에 앉아 배낭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지?’하고 문을 열어보니, 목이 마를 정도로 화창하던 하늘에서 갑작스럽게 우박과 비가 와장창 쏟아지고 있었다. 순례자들은 놀라 문 앞에서 입이 떡 벌어졌고, 나는 외쳤다. “내 빨래!!!!!!” 그때였다. 누군가가 밖에 널려 있던 빨래들을 죄다 안으로 옮겨놓은 것이었다. 순식간에 젖었을 텐데, 그걸 주워 옮기느라 얼마나 고생했을까. 나는 그 순례자에게 연신 말했다. “넌 천사야, 진짜 엔젤이야!!”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짓고 있는데, 이번에는 알베르게 안쪽에서 또 웅성웅성하더니, 비가 새기 시작했다. 내가 배정받은 침대가 있던 왼쪽 벽은 괜찮았지만, 오른쪽 벽은 심각했다. 바닥엔 물이 잔잔하게 고였고, 벽에 붙은 침대들과 배낭이 줄줄이 젖었다. 당황했지만, 순례자들은 모두가 말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건과 대걸레를 들고 물을 닦고, 침대를 벽에서 떼어내 정리했다. 아무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지만 그 조용한 협동은 마치 소리 없는 아비규환 같았다.
비가 잠잠해지자 저녁을 먹기 위해 알베르게 밖으로 나왔다. 뒤편에 진흙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산이 보여 호기심에 올라가 보려 입구까지 갔지만 잠겨 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언덕 위에서 나헤라 마을을 내려다보며 ‘이 산 위까지 올라와본 순례자들은 몇이나 될까?’라고 생각하며 발끝으로 잠겨 있던 철문을 톡 건드려봤다. 산 위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기분이 어떨까 상상해 보다가, 아쉬움을 뒤로하고 마을로 내려왔다. 그런데 마을로 내려가보니 뜻밖에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아까 봤던 진흙산이 비를 맞고 흘러내린 흙으로 마을의 낮은 곳, 특히 식당가를 덮쳐버린 것이다! 대부분의 식당이 운영을 멈췄고, 거리는 소방차로 가득했다. “굶어야 하나?!” 하수구가 넘쳐흐르는 진흙길을 간신히 건너 마을에서도 그나마 높은 언덕 쪽으로 몸을 옮겼다. 신기하게도 조금만 올라와도 세상은 전혀 달라졌다. 아까까지 우당탕탕 난리가 났던 마을과 달리, 언덕 위는 마치 다른 나라처럼 평화로웠다. 비는 이미 그쳤고, 골목길에는 고요함만 흘렀다.
언덕 꼭대기에는 ‘킹덤바(Kingdom Bar)’라는 간판이 커다랗게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성으로 돌아온 기사처럼 감격스러웠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축축했던 공기 대신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생일파티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이미 기운이 다 빠져 입구 앞 제일 작은 테이블에 앉았다. 직원은 젊은 남자였는데 묘하게 사이보그 같은 느낌이 났다. 표정은 인자한 웃음이 처음부터 끝까지였는데, 동작은 무척 느렸다. 시그니처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기다리며 올리브를 주문했는데 올리브가 깜짝 놀랄 정도로 푸짐하게 나왔다. 그리고 바로 이게 유럽 올리브? 적당히 느끼한 정말 맛있는 초록 올리브였다. 나중에 계산할 때 보니 영수증에 올리브가 아예 찍혀있지 않았다. 원래 그냥 주는 건지 직원이 깜빡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올리브는 정말 맛있었다는 거! 그렇게 힘없이 샌드위치를 씹었다. 한입 한입이 오늘 걸은 20km보다 값지게 느껴졌다. 그날은 이상하게도 순례길에서 걸었던 길보다 저녁을 위해 올라온 길이 더 길고, 더 험했던 것 같았다.
그렇게 알베르게로 돌아왔는데 이번엔 정전이었다. 다들 헤드랜턴을 머리에 두른 채 책을 읽거나, 양치를 하고, 배낭을 쌌다. 나는 그 모습들을 바라보며 이상하게도 들뜨고 흥미로웠다. 우박, 정전, 누수까지… 오늘 하루는 도대체 몇 번이나 우리를 시험하는 걸까? 이런 하루를 순례길에서 많은 순례자들과 겪다니 이건 정말 특별하다. 그렇게 나도 촛불에 의지해 ‘믿기지 않는 하루’라는 말을 시작으로 오늘의 일기를 마무리했다. 믿을 수 없는 하루였지만, 분명히 오래도록 기억될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