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신발 어디 갔어!!!

산티아고 순례길 Day9

by 재인

어제 내린 비 때문일까, 아니면 나헤라 근처의 진흙 지형 때문일까. 오늘 순례길은 말 그대로 진흙탕이었다. 초콜릿을 녹여 부어놓은 것처럼 질척한 진흙이 신발에 덕지덕지 들러붙었다.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찍-’ 하는 소리가 났고, 순례자들은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발을 떼었다. 잘못 디디면 신발이 진흙에 쏙 하고 빠져버려 발만 허공에 남았다. 결국 발목까지 진흙에 잠겨버린 순례자도 있었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해결했으려나..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길은 엉망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하늘은 너무 아름다웠다. 해가 떠오르며 분홍빛으로 세상을 물들었다. 일출은 아름다웠지만 내 발밑은 안 아름다웠다.


마을 하나를 지나며 바에 들어섰을 때, 텔레비전에서 어제의 진흙 사태를 뉴스로 다루고 있었다. 불과 20분 동안 쏟아진 우박과 비가 마을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했다. 어제 우리가 걸어온 길이 그야말로 재난 현장이었다는 걸 텔레비전을 보고서야 실감했다. 자연은 정말 순식간에 모든 걸 바꿔놓는다. 그 속에서 걷다 보면 새삼 깨닫는다. 우리는 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은 존재라는 걸.


산토 도 밍고로 이어지는 길은 끝이 보이는 일자 길이었다. 분명 마을이 눈앞인데, 이상하게 가까워지지 않았다. 걸어도 걸어도 그대로인 풍경 속에서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요즘 들어 트레킹화 때문에 발이 점점 더 피곤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마을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크록스로 갈아 신는 것이었다. 크록스는 이번 순례길 준비물 중에서 최고의 선택 중 하나였다. 알베르게에서는 흙 묻은 트레킹화를 무조건 신발장에 벗어두어야 하는데, 쪼리는 양말 신고 신기 불편하고, 일반 슬리퍼는 걸을 때 미끄럽거나 가방에 넣기 불편했다. 그에 비해 크록스는 카라비너로 배낭에 달아두면 되고, 쿠션도 있어서 발도 편안했다. 나는 이번 여름 큰마음먹고 산 노란 크록스를 순례길에서 알차게 쓰고 있었다.


그런데.. 약간 지겹던 그 긴 일자 길을 드디어 끝내고 마을입구에서 배낭을 내려두고 신발을 갈아 신으려는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크록스가.. 한 짝뿐이었다. 다시 보고, 또 확인했지만.. 정말 한 짝뿐이었다.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어디서 떨어진 거지? 진흙길 어딘가에? 다시 돌아가야 하나? 아니면 그냥 하나 새로 사야 하나? 알베르게 입장도 트레킹화로는 불가능하다는 게 머릿속을 스쳐갔다. 크록스가 없으면 오늘 하루가 꼬이는 건 물론이고, 내 멘탈도 함께 무너질 게 뻔했다. “그래.. 딱 30분만 거꾸로 걸으며 찾아보자..” 배낭을 마을 입구에 있던 공장 구석에 내려두고 울먹이는 눈으로 빠르게 되돌아 걷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순례자들에게는 말없이 아련한 눈으로만 물었다. “혹시.. 내 크록스 봤어..? “ 사람들은 하나같이 ”쟤 어떡하냐.. “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창피할 겨를이 없었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오직 하나, 내 크록스를 되찾는 것뿐이었다. 쭉 뻗어 있는 일자 길을 간절한 마음으로 걸었다. 이 길 끝까지 가도 못 찾으면.. 오늘 하루는 정말 최악으로 끝날 것 같았다. ‘그래도 이것마저 여행의 한 장면이지..’ 마음을 다잡아 보는 순간, 나를 지나가던 순례자가 손짓을 했다.


”앞에! 조금만 더 앞으로 가봐! “


설마.. 하는 마음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길 끝을 바라봤다. 멀리서 한 순례자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해가 기울며 그의 뒤로 부드러운 햇빛이 내려앉았는데, 정말 후광처럼 보였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는 장난스레 ’ 짠!‘하고 배낭을 돌렸다. 그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건 내 노란 크록스 한 짝이었다. 세상에. 진짜 찾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알고 보니, 내가 크록스를 배낭에 매달고 걷던 걸 기억한 이 순례자가 길 위에 떨어진 걸 주워 배낭에 달아놓은 것이었다. 그 사람은 내 이름도, 내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지만, 길 위에서 잠깐 스쳐간 나를 기억해 준 것이다.

순례길에서 ’ 부엔까미노!’ 하고 지나친 수많은 얼굴들 중 한 사람이, 내 크록스를 보고 날 떠올려줬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마음 하나 덕분에 나는 내 반쪽 크록스를 되찾았다. 우리는 길 위에서 웃으며 인사를 나누었고, 크록스를 들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내 표정은 울먹임과 행복이 뒤섞인 아주 이상한 표정이었지만 괜찮았다. 왜냐하면, 내 손에는 다시 두 짝의 크록스가 쥐어져 있으니까! 혼돈으로 시작된 하루의 끝은 결국 해피엔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