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Day10
산토 도 밍고에서 하루를 보내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지도 벌써 열흘이 되었다. 아직은 여러 사람들과 다 같이 자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자꾸 새벽에 깨서 화장실에 가곤 한다. 그런데 오늘은 통잠을 잤다. 무려 9시 30분부터 새벽 5시까지. 점점 잘 적응해 가는 것 같아 괜히 뿌듯했다. 발도 조금씩 아파오고 있어서, 예전보다는 자주 쉬어가는 시간도 생겼다. 같이 동행하던 셰프님은 가끔씩 내 크록스가 두 짝이 다 달려있는지 확인도 해주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크록스를 한번 잃어버릴 뻔했어도, 새벽에 잠이 깨도, 발이 아파도 이 순간들이 마냥 소중하고 아쉽기만 하다. 오늘은 드넓은 들판길을 걸었다. 날씨가 너무 좋았다. 푸른 하늘과 하얀 뭉게구름. 구름이 거의 움직이지 않아, 마치 그림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분명 잊을 수 없는 풍경인데도, 벌써 조금 흐릿해진다. 이 멋진 풍경들에 익숙해지는 나 자신이 괜히 미워졌다.
벨로라도라는 비교적 큰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괜찮아 보이는 식당을 찾았다. 평소보다 좀 더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레스토랑. 순례자의 몰골로는 살짝 민망한 느낌도 있었지만, 이미 배는 고팠고, 오늘은 괜히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싶었다. 메뉴판을 훑던 중 스페인식 순대를 발견했고, 호기심에 주문해 봤다. 음식이 나왔을 때, 나는 잠깐 멈칫했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한국식 순대와 매우 흡사했다! 하지만 조각조각 잘려 바삭하게 튀겨진 형태였는데, 한 입 베어 물자 고소한 맛 뒤로 스페인 특유의 약간 시큼한 향이 퍼졌다. 내 입에는 묘하게 어울리면서도 낯선 느낌이 섞여 있었다.
보통 많은 순례자들이 벨로라도에서 하루를 마무리하곤 한다. 마트, 식당, 약국 필요한 것들이 모여 있는 덕분에 편하게 쉴 수 있는 마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오늘 여정은 아직 5km가 더 남아있었다. 저녁에 묵을 알베르게 식사를 예약해 두었기 때문에, 느긋하게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일어설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 뜻밖의 반가운 얼굴들과 마주쳤다.
며칠 전, 나헤라를 가는 길에 처음 인사를 나눴던 한국인 순례자 부부였다. 길 위에서 한국인들을 만나면 반가워 먼저 인사를 드리곤 하지만, 그때는 다소 대면대면한 분위기였다. ‘혼자 걷고 싶은 스타일이신가?‘그런 생각들이 들어 조심스럽게 거리를 뒀던 분들이었다. 함께 걷는 동안 혹시 나를 불편해하시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괜히 살갑게 다가서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그분들 역시 젊은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게 부담스럽지 않을까 걱정하고 계셨다는 것. 결국 우리는 서로를 배려하느라 서먹했던 셈이었다. 그렇게 쌓인 내적 친밀감 덕분일까. 오늘 이 식당에서 우연한 재회는 훨씬 따뜻하고 반가운 순간이 되었다. 두 분은 부산에서 오신 부부셨고, 따님이 나와 동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머님은 조곤조곤한 말투로 내 두 갈래로 땋은 머리를 보며 수줍게 웃으셨다. “전부터 계속 생각했어요. 꼭 빨간 머리 앤 같아요 “ 그 말을 듣는 순간 누군가가 어떤 인상을 오래 기억해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했다. 아버님은 역시 부산 스타일의 상남자 느낌이 가득하셨다. ”맥주 한 잔 합시다!!! “ 그 호탕한 말과 함께 양고기 스테이크와 오징어 요리도 추가로 시켜주셨고, 맥주잔을 척척 따라주셨다. 나는 이미 일어나야 할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이 시간을 쉽게 끊을 수 없었다. 그 따뜻한 환대와 한국인의 정이 시간은 촉박했지만, 배는 든든했고 마음은 그보다 더 풍성해졌다.
그렇게 오후 4시쯤, 이미 도착해서 씻고 쉴 시간이었지만 나는 잔뜩 배부르고 약간 취한 채 음주 걸음을 옮겼다. 길가엔 해바라기 밭이 가득했다. ‘오늘 2층침대는 확정이다.’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며 서둘러 걷는 내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도착한 마을 토산토스. 작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오늘 묵게 된 알베르게도 무니시팔이 아닌, 마치 민박집 같은 곳이었다. 아담한 주택에 엔틱 한 느낌의 화장실, 푸르른 잔디마당. 그 위엔 복숭아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시원시원한 스페인 언니가 운영하는 알베르게였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면 윙크를 해주었다. 반할 뻔했다.
벨로라도에서 걸어오는 길에 저 멀리 산 절벽에 붙어 있는 작은 집 같은 게 눈에 띄었는데, 그게 바로 토산토스 뒷산에 있던 작은 기도원이었다. ‘저긴 뭐지?’ 궁금했던 그 건물이 실제로 눈앞에 있었다. 산을 올라가 보니 절벽에 작은 예배당 같은 공간이었고, 문은 잠겨 있었지만 무니시팔 알베르게에서 관리하며 투어도 운영한다고 한다. 이런 작은 마을의 절벽에도 교회가 있다는 게 신기했다. 믿음이 있다면, 예배의 자리는 어디든 괜찮은 거구나 싶었다.
다시 산을 내려와 알베르게 마당에 앉아 스트레칭을 하고 일기를 쓰는데, 복숭아나무에서 복숭아 하나가 ‘콩’하고 내 머리를 때렸다. 웃음이 나왔다. 무심히 복숭아를 들고 향을 맡았는데, 와.. 이건 정말 복숭아 향수 그 자체였다. 인위적인 향이 아닌, 자연 그 자체의 달고 싱그러운 냄새였다. 이 복숭아는 그 후로 근 일주일 넘게 내 가방 안에 있었다. 힘들 때마다 꺼내 향을 맡았다. 시간이 흘러 밤 9시. 알베르게의 불이 꺼졌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누군가 피곤했던 순례자가 먼저 불을 끈 것 같았다. 어쩌면 산티아고 순례길의 필수품은, 야간 안경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