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Day11
확실히, 행색이 점점 꼬질꼬질해지고 있다. 얼굴은 많이 탔고 (거울을 보고 나도 깜짝 놀랐다), 손은 건조해졌고, 얼굴살도 조금 빠진 것 같다. 가방에 머리가 걸리는 게 싫어서 거의 매일 머리는 양갈래로 묶고 다니는데, 어쩌면 이게 내 까미노 이미지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제일 밝게 웃으며 ‘올라!’하고 먼저 인사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들 무표정으로 걷다가도, 내가 인사를 건네면 사르르 표정이 풀리며 “올라“라고 답해준다. 그 순간이 나에겐 매번 작은 도파민처럼 느껴진다. 이러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아무한테나 인사하고 다닐 것만 같은 용기도 생긴다.
순례자 여권도 다양한 쎼요로 한쪽을 다 채웠고, 자주 마주치는 반가운 얼굴도 하나 둘 생겼다. 도착해서 씻고 마을을 구경하다가 가장 마음에 드는 장소를 골라 일기를 쓰는 이 루틴이 이제는 하루를 행복하게 마무리하는 습관이 되었다. 이 시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싶다. 다 잊지 않고, 일기장에 모조리 적어두고 싶다.
오늘도 해뜨기 30분 전, 오전 7시에 출발했다. 올려다보면 별들이 아직도 눈에 가득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오리온자리가 이렇게 잘 보이다니, 너무 놀라웠다. 그러다 어느 순간 등 뒤로 붉게 물든 일출이 차오른다. 뒤돌아볼 때마다 달라지는 하늘의 색, 그리고 하늘이 제일 붉게 물들었을 때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햇볕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다. 하지만 오늘은 꽤 추웠다. 어제 주운 복숭아 향을 맡지 않았더라면 진심으로 버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라 리오하 주‘에서 ’ 카스티야 이 레온 주’로 행정구역을 넘어온 뒤로, 아침공기가 부쩍 차가워졌다. 지대도 높아졌고 바람도 세졌다. 경량패딩을 꺼내 입고 바들바들 떨며 걸었다. 낮은 산을 타는 느낌이었는데, 길가엔 순례자들이 하나하나 쌓아 올린 돌 화살표도 보였다. 나보다 앞서 걸었던 선배 순례자들의 ‘이쪽이야’라는 마음이 겹겹이 쌓여서, 이제는 누구나 볼 수 있는 큰 방향이 되었다. 나도 그 곁에 조심스럽게 돌 하나를 올렸다.
순례길을 걸으며 나는 매일 체크리스트를 만든다. 내일은 얼마나 걸을지, 어느 마을에서 묵을지, 어떤 알베르게를 고를지. 초반엔 인프라가 좋고 무니시팔 알베르게가 있는 마을에 맞춰서 움직였다. 다들 비슷한 경로를 택하다 보니 어쩌면 조금은 정해진 길을 걷는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요즘은 달라졌다.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내 마음에 드는 마을에서 내 눈에 들어온 알베르게를 고르는 일이 점점 더 중요해졌다. 그게 내가 걷는 길이라는 걸, 더 깊이 실감하게 되는 요즘이다.
그래서 오늘은 성당 하나 없는 작은 마을 ‘아타푸에르카’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대장장이 같던 스페인 아저씨가 손수 지은 나무 오두막 알베르게에는, 손으로 만든 소품과 타일들이 가득했다. 나는 독일 사람들과 같은 방을 쓰게 되었고, 화장실도 샤워실도 하나였다. 따뜻한 물도 잘 나오진 않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엔틱 한 타일이 붙은 아늑한 주방만 좋은 기억으로 남는다.
오늘도 가장 마음에 드는 곳, 알베르게 앞에 작은 나무 테이블에 앉아 일기를 썼다. 그곳에서 조금 걷다. 메뉴 델 디아가 있는 식당에 갔는데 사장님 얼굴이 너무 무서워 보여서 속으로 긴장을 잔뜩 했다. 피터팬에 나오는 해적 같달까. 그런데 소금을 줬다 뺐다 하면서 웃으며 장난을 치시는 거다. 사실은 무뚝뚝한 얼굴 뒤에 다정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던 것. 오늘도 그렇게 따뜻한 오해가 하나 풀렸다. 그리고 역시 와인의 나라 스페인. 한잔 가격에 와인을 한 병씩 세팅해 주어서 오늘은 많이 취해버렸다. 이제는 정해진 루트보다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하루를 계획하게 된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많이 가는 길을 따라갔지만, 지금은 점점 내가 고른 길을 걷는 중이다. 아주 당연한 변화처럼 느껴지지만, 그 안에 나만의 리듬이 생기고 있다는 게 스스로 대견하다. 내일도 그 리듬대로 걸어가면 될 것 같다. 복숭아 향을 맡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