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무교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 Day12

by 재인

생장부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이어지는 순례길에서 ‘도시’라 부를 수 있는 구간은 손에 꼽힌다. 팜플로나, 로그로뇨, 부르고스, 레온, 사리야, 그리고 마지막 산티아고까지. 오늘은 그중 세 번째 도시, 부르고스로 간다.


출발할 때부터 길 위엔 부슬비가 내렸다. 큰 산을 오르는 초입, 거의 꼭대기의 가까워질 즈음, 일출이 시작됐다. 완전히 떠오른 태양은 아니었지만, 분홍색과 보라색 구름이 깔린 하늘과 그 사이로 우뚝 솟은 십자가의 조합은 정말 경이로웠다. 꼭대기 풍경은 마치 들판 같았고, 그 위에서 나는 잠깐 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종교가 없지만 이런 장면을 마주할 때면 문득 ‘정말 누군가가 이런 세상을 창조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 찰나인 궁금증 하나가, 어쩌면 신앙의 시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무교다. 순례길이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길이라는 건 출발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깊은 맥락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이 길에 오른 이유도 신앙이나 기도보다는, ‘건강할 때 나 자신에게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출발점인 생장에서는 성당에 찾아가 보지도 않았다. 당시의 나는 순례길을 그냥 ‘트레킹’이라고만 받아들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그 단순함이 흔들렸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너무 많은 걸 모르고 걷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 한구석에서 부끄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매일 마주치는 수많은 성당들, 성당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들, 순례자 여권에 쎄요를 받기 위해 들렀던 성당들, 그리고 지나가며 듣게 되는 종소리들. 이런 요소들이 점점 나를 멈춰 세웠다. 함께 걷던 한국인 순례자분들이 성당 안에서 이것저것 설명해 줄 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이 길을 걷고 있었구나”싶은 순간들이 생겼다.


그래서 그때부터 조금씩 알아보기 시작했다. 처음엔 단순한 궁금증이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이 왜 그렇게 유명한지, 성당 안에 있는 모형들과 그림들은 누구인지.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복잡한 신학책보단, 어린이 성경 E-Book을 켰다. 하루 한두 장씩 그림과 함께 읽었다. 그렇게 점점 이 길이 단순한 트레킹 코스가 아니라, 수많은 순례자들의 믿음과 발걸음이 쌓인 길이라는 걸 체감하게 되었다.


비는 계속해서 부슬부슬 내렸고, 우비를 쓰기엔 애매한 날씨였다. 새로 산 경량패딩은 다 젖어가고 우비를 쓸까 말까 고민만 하다 어느덧 부르고스에 도착했다. 도시 초입에는 크고 긴 공원이 있었고 그 길을 걷다가 큰 통나무를 입에 물고 뛰어가는 강아지를 봤다. 여기서 사는 애완견들은 정말 자유롭고 행복해 보였다. 엄마가 보내준 우리 집 강아지 사진이 떠올랐다. 집 안에서 산책만 기다리다, 목줄을 차고 아파트 한 바퀴를 돌고 오는 삶. 나는 그 산책마저도 귀찮아할 때가 많았다. 이곳과는 삶의 결이 너무 달랐다. 우리 강아지에게 괜히 미안해졌다.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샤워를 하러 갔다. 부르고스 알베르게는 론세스바예스처럼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무니시팔 알베르게였고, 샤워실이 탈의실과 분리돼 있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줄리앙을 만났다. 며칠 전 내 크록스를 주워줬던 스페인 친구였다. 줄리앙은 부르고스가 마지막 목적지라고 했다. 그래서 내 노트에 자기 이름과 연락처, 우편 번호까지 전부 적어줬다. 나도 줄리앙의 일기장에 작은 그림을 그려주며 “정말 고마웠다”는 짧은 글을 한국어로 남겼다. 스쳐간 인연이, 짧지만 또렷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른 부르고스 대성당. 순례자들이 “꼭 가봐야 한다”라고 말하던 곳이다. 성당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별생각 없었는데 막상 들어서자 그 안에 있던 것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알록달록한 스테인글라스에 그려진 인물들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라는 것도, 벽화 속 인물들 머리뒤에 비치는 둥근 후광이 성인을 상징한다는 것도. 분명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화려한 장식처럼 보였을 것들이 이제는 다르게 보였다. 아는 만큼 세상이 가까워지고, 낯설었던 공간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내게는 그 어린이 성경이 꽤 큰 역할을 했다. 아주 사소하지만 분명한 변화였다.


부르고스 대성당처럼 웅장한 건물도 있고, 토산토스 절벽에 딱 붙어있는 작은 예배당도 있었다. 건물의 크기와 내부는 전혀 다르지만, 그 안에서 나는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을 기대고 싶은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 나는 지금도 무교이고, 앞으로도 종교를 가질 생각은 없다. 하지만 신의 존재 여부를 떠나, 단 하나의 믿음에서 시작된 기도가 작은 방을 채우고, 마침내 찬란한 성당으로 피어나는 모습을 보면 그 믿음의 힘과 인간의 열망은 경이롭고도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 믿음이 만들어낸 건물, 삶, 문화, 그리고 내가 걷고 있는 순례길. 그 모든 것을 깊이 존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