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Day13
처음으로 늦잠을 잤다. “재인 씨~” 부드러운 목소리에 화들짝 눈을 떴다. 함께 걷는 한국인 순례자분이 조심스럽게 나를 깨웠다. 알람도 못 맞추고 그야말로 기절해 있었던 것. 하루 종일 걷는다는 건 역시 몸에 꽤 큰 부담을 주는 일이다. 오늘은 종일 비 예보가 있어 미리 배낭에 레인커버를 씌우고 알베르게를 나섰다. 오늘의 목적지는 정확한 지역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엄청 큰 냄비에 빠예야를 만들어준다”는 소문을 듣고 알베르게를 예약했다. 오늘은 비를 뚫고 빠예야를 향해 걷는 하루였다.
부르고스를 벗어나자마자 쏟아지기 시작한 비. 바람까지 몰아쳐 우비를 꺼내 입는 것조차 버거웠다. 다행히 나와 론세스바예스에서 만나 인연이 된, 셰프 일을 하신다는 한국인 순례자분이 도와주셔서 무사히 우비를 입을 수 있었다. 배낭을 안에 매야할지, 우비를 입고 배닝을 매야 할지조차 몰랐던 내게는 큰 도움이었다. 덕분에 이 정신없는 빗속에서도 출발이 가능했다. 조금 로망이었던 ’ 우비 입고 빗소리 들으며 걷기‘는 생각보다 거칠고 고단했다. 바람은 무섭게 몰아쳤고, 셰프님이 입은 얇은 일회용 우비는 찢어지기 직전. 바람에 날려 바스락 거리는 소리는 자꾸 나에게 매섭게 말을 걷는 듯했다. 그때, 눈앞에 작은 성당 하나가 보였다. 길가에 조용히 서 있는 아주 작은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연세가 지긋한 수녀님이 입구에 앉아 성경을 읽고 계셨다. 마치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 따뜻한 미소로 맞아주셨다. 수녀님은 내 이름을 물으시고 다 젖은 내 머리 위에 조심스레 손을 얹으셨다. 그리고 스페인어로 조용히 기도해 주셨다. 무슨 말인지는 몰랐지만, 기도는 분명히 나를 위한 것이었다. 그 손길에서, 그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그리고 작은 참이 달린 끈 목걸이를 내 목에 직접 걸어주셨다. 비에 젖어 춥고 기진맥진하던 순간, 누군가의 응원은 그 무엇보다 따뜻했다. 정말이지 마음과 몸이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비를 뚫고 드디어 알베르게에 도착하자, 마치 누가 장난친 것처럼 하늘이 맑게 개었다. 파란 하늘 아래 햇살이 쏟아졌다. 날씨가 얼마나 좋아진 거 냐면 젖은 신발도 그날 안에 모두 말랐다. 도착했을 땐 온몸이 젖고 눈동자엔 영혼이 없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빠예야를 앞두고 햇살이 쨍쨍! 누가 말했다. “이런 게 바로 인생이야.” 그땐 그 말에 공감이 됐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조금 오글거린다. 왜냐하면 2주 후, 재난 수준의 태풍을 또 한 번 뚫고 걷게 되니까.
사람들과의 이별도 이 무렵부터 더 아프게 다가왔다. 혼자 걷을걸 알고 온 순례길이었지만, 뜻하지 않게 여러 사람들과 함께 걸어오며 관계에 기대게 됐다. 그들과 다 같이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내가 이곳에 와서 강해지려는 건지, 오히려 약해지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혼자 걷는 것이 이렇게 막막하게 느껴질 줄이야.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걸려온 아빠의 전화에 신이 나 영상통화로 이런 길을 걷고 있다고 보여주며 신이 났다. 그러다 전화를 끊고 문득 가족도, 친구도, 함께 걷던 사람들도 모두 그리워졌다. 그러면서도 다시 또 혼자 걷고 싶다는 마음도 드는 걸 보면, 타지에서의 내 마음은 참 갈팡질팡이다.
해가 질 무렵, 드디어 저녁시간. 모두가 알베르게 주방 문 앞에서 설레며 기다리고 있었다. 길게 차려진 테이블 위엔 이미 식기가 가지런히 놓였고, 한쪽에선 커다란 냄비에 빠예야가 볶아지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사람들은 설레는 표정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빠예야 냄비의 뚜껑이 열리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다. 모두가 빠예야에게 사랑 고백이라도 받은 듯 행복한 얼굴이었다. 빠에야가 담긴 접시는 옆자리로, 또 옆자리로 전달되며 계속 나누어졌다. 와인을 따르고 모두가 함께 외쳤다. “부엔 까미노!” 이곳에서 국적도, 나이도, 성별도 상관없다. 순례자라는 이유 하나로 모두가 친구가 된다
내 옆자리엔 미국에서 온 ’ 조이‘가 앉았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말에 그녀는 반가워하며 자신이 샤이니 팬이라고 사진을 보여줬다. 그녀는 샤이니를 보기 위해서 한국도 여러 번 방문했다고 했다. 내가 종현과 같은 예술 고등학교를 나왔다고 하자 더 기뻐하며 샤이니 이야기를 신나게 쏟아냈다. 우리는 빠예야를 먹으며 샤이니 노래를 흥얼거렸고, 와인잔을 부딪히며 ’ 부엔 까미노‘를 또 외쳤다.
이후 단체 사진을 무려 열 번은 넘게 찍었다. 서로의 핸드폰으로 돌려가며 촬영하고 찍고, 또 찍고. 생각해 보면 오늘 여기에 앉은 모두가 거센 비바람을 뚫고 온 사람들이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데 이 식탁 위에선 누구 하나 피곤한 기색이 없다. 그저 서로의 만남을 기뻐할 뿐이다. 지금은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이 밤이 어쩌면 두고두고 꺼내보게 될 추억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