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왜 거실에 TV를 없애야 하는가

by 오인환

TV가 '바보상자'라는 오명을 쓰기 전, '무협지'나 '만화책'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TV가 만화책과 무협지에 이어, '바보 생산'의 원흉이 됐지만, TV 또한 얼마 후 그 자리를 스마트폰에 넘겨 주었다. 그렇다면 만화책, 무협지, TV, 스마트폰은 정말 '바보'를 만드는 '원흉'일까. 그렇지 않다. 그것이 아니라 그것이 갖고 있는 '컨텐츠'가 '바보'를 만드는 것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중독성'이다. 중독이란 무엇일까.

중독성은 '의존성'과 연관되어 있다. 어떤 것에 의존성이 강해지는 것을 말한다. 즉, 그 행동이나 약물, 대상에 의존하여 그것이 없으면 안 될 것 처럼, 삶이나 심리의 일부분이 소모되는 것이다. 우리의 의존성은 대체로 '쾌락'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쾌'라는 감정을 좋아한다. '쾌'는 일종의 흥분 상태다. 이런 '쾌'를 얻기 위해 보상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즉각적인 보상'이다. 우리의 뇌파에는 '감마파'가 있다. 감마파는 극도의 흥분상태에서 뇌가 발산하는 파장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감마파는 쾌와 불쾌 두 상태에 모두 발생을 한다. '쾌'와 '불쾌'에 대해, 우리 뇌가 같은 반응을 하는 것이다. '행복'은 정의하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불행'의 반대다. 즉 어떤 반응이 일어나느냐가 아니라, 어떤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지가 중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행복'은 '쾌'에서 오지 않는다. 쾌는 불쾌와 같은 자극을 주기 때무이다. 엄밀히 말하면 '행복'은 잔잔하고 안정적인 상태다. 비교적 잔잔한 파동을 형성하는 '알파파'가 굳이 따지면 행복에 가깝다.

쾌와 불쾌의 파동은 어떻게 만드나. 긴장감이다. 사람들은 부정적인 이야기에 더 큰 자극을 받는다. 우리는 고통을 싫어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고통과 쾌락은 뇌에게 같은 형태를 갖고 있다. 고로 우리는 고통을 좋아한다. 우리는 좋은 것만 보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불쾌하고 공포스러운 것을 보고 싶어하기도 한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커다란 상자 속에 손을 넣어 속에 있는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고 해보자. 상자 속은 캄캄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해보자. 그러다 '따끔'거리는 통증을 갖게 된다. 이 통증을 일으킨 대상이 분명 좋은 것일리는 없다. 다만 우리는 반드시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자 한다. 그 불쾌한 것을 반드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린다. 호기심은 '무지'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밝음'보다 어둠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어둠이 가져다주는 불확실성 때문이다. 카드 게임에서 나에게 무슨 패가 왔는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열어보는 것도 그것이 주는 불확실성이 우리 뇌에 감마파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체로 불확실한 것에 '긴장'하고 '불쾌'를 느낀다. 다시 말하면, 그 불쾌의 감정은 쾌와 맥락을 같이 한다. 고로 그것은 싫으면서 좋은 감정이다. 이처럼 불확실성을 확장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것에 호기심을 갖고 호기심은 관심을 불러 일으킨다. 위험한 곳일수록 사방을 두리번 거리며 살피는 것 처럼 우리는 반드시 사방에 무엇이 있는지 찾아 헤매게 된다. 이처럼 어둡고 불확실하고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들은 어디에 있을까.

대부분의 뉴스다. 뉴스 부정적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신문을 읽는 것은 불확실성을 확실성으로 바꾸는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불확실성을 확대한다. 사람은 자신이 아는 공간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난생 처음 가는 '아마존 정글'보다 자신의 방에서 훨씬 더 안정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것이 '불확실성'이 최소화 됐기 때문이다. 다만 뉴스의 경우는 다르다. 뉴스는 수익 구조는 대체로 광고에 의존한다. '언론사'별로 차이는 있겠지만, '클릭률'이나 '구독률'은 직접적으로 영업이익에 영향을 끼친다. 다시 말해,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의 특성상, 더 많은 사람들이 반응하는 기사를 쓸 수 밖에 없다. 언론은 대체로 공공을 다루지만 공공기관은 아니다. 공공을 위해 일하지도 않고, 공공을 위해 이익을 내는 집단도 아니다. 언론사는 주식회다다. 조선일보를 예로들어보자. 조선일보의 2019년 매출액은 2991억원이다. 여기에 영업이익이 301억원이다. 이 회사는 방상훈 대표이사가 30%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즉 언론사의 주인은 '개인'이며 영리를 목적으로 한다. 실제 4대 재벌광고의 3분의 1이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에 광고한다. 8개의 신문 중 4대 재벌 광고 비율이 가장 낮은 곳은 2014년 기준으로 한겨례 신문이었지만 그 비율도 25.1%나 된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21년 신문산업실태조사'에 따르면 일간 신문 매출액의 63.7%가 광고 수입이다. 구독료를 통한 수익은 전체의 15.7%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언론의 주요 고객은 '개인'이 아니라 '기업'이며, 주인 또한 '공공'이 아니라 '개인'이다.

마케팅은 쉽게 말해 '전략'이다. 전략이란 상대의 취약점을 파고 드는 '전쟁'에서 사용하는 일이다. 다시말해 마케팅은 분석을 통해 대상을 파악하고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판매이익을 올리는 일이다. 이 일은 과거에는 지면으로 있다가, 공중파로 옮겨졌고 이후에는 온라인으로 넘어갔다. 고로 온라인은 완전한 '마케터들의 전쟁터'다. 사슴과 토끼가 가득한 사냥터에 능력있는 마케터가 사냥꾼으로 등장하여 마구자비로 사냥한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관료적이다. 관료주의는 체계를 갖추고 규모를 키울수록 인간성이나 도덕성이 결여된다. 그것이 시스템의 비인간화다. 이런 시스템의 비인간화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악의 평범성'은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주장한 개념이다. 이는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홀로코스트 실무 책임자를 공개 재판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아이히만은 홀로코스트 대학살을 주관한 인물이다. 고로 매우 사악하고 악마같아야 한다. 다만 그는 꽤 친절한 사람이었고 그저 평범한 공무원이었다. 이로 인해 '한나 아렌트'는 선한 사람들도 악의를 품지 않고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TV나 온라인은 우리를 긴장의 속으로 집어 넣고 판단성을 흐리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이 악한 의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시스템은 그것을 그렇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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