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인환 Mar 23. 2024

[인문] 환경이 척박할수록 더 감사해야 하는 이유_바이

 산불이 나면 모든 동물은 산불을 피해 도망을 간다. 풍뎅이는 반면 산불 난 곳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알을 낳는다.

 이 시대 지성인이던 '이어령' 선생은 경쟁력과 생존력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경쟁력과 생존력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비슷하지 않다는 것이다. 힘의 논리로 봤을 때, 공룡이 사라진 자리에는 보다 더 강한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공룡이 사라진 자리 뒤에 더 작고 나약한 종들이 번식해 갔다. 남들보다 뛰어난 경쟁력이라는 것은 때로 생존력 앞에 무력할 뿐이다. 남들이 피해간 척박한 곳에 자리잡고 적응하는 생존력은 결국 경쟁자 또한 이기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싸우지 않고 이기는 종인 것이다. 어떤 경쟁자도 '환경' 앞에 무력하다. 노자의 도덕경에는 이와 같은 표현이 있다.

 '누군가 너에게 해악을 끼치려거든 앙갚음하려 들지마라. 강가에 고요히 앉아 강물을 바라보아라. 그럼 머지 않아 그의 시체가 떠내려 올 것이다. 강한자가 살아 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고로 가장 강한 자는 경쟁 관계에서 우위에 서는 것이 아니다. 가장 강한 자는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다.

 풍뎅이가 산불이 난 자리를 찾아가는 이유는 그곳이 안락하고 좋기 때문이 아니다. 그곳이 척박하기 때문이다. 경쟁자와는 상관없이 자기 자신과의 경쟁을 하는 것이다. 가장 척박한 환경에서 잘 적응하는 과정은 때로는 어떤 경쟁자와의 대립보다 위험하고 어려울 수 있지만 환경에 적응하고 나면 그 뒤에는 어떤 경쟁자도 상대할 수 없는 생존자가 된다. 날지 못하고 뒤뚱뒤뚱 걸어 다니는 새, 펭귄은 자신의 천적을 피해 스스로 영하 70도의 추위로 걸어 들어갔다.

 모든 투쟁의 흔적은 상흔이 되어 자리에 남는다. 이 상흔은 치열한 환경과 다툼의 흔적이다. 이렇게 호랑이는 날카로운 송곳니와 발톱이라는 상흔을 남겼고 기린은 커다란 목을 남겼다. 자신을 위협하는 환경에 적응하고자 했던 수많은 세대의 상흔이다. 이렇게 우리 인간에게도 남은 '상흔'은 '지성'이다. 이런 '인류학적인 진화'의 흔적은 승리의 표식으로 여겨지지만 바뀐 환경에서 이겨내기 위해 가져야 했던 변화의 흔적이다. 진화론적으로 진화를 얻어내기 위해, 개체는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가. 그 희생은 영광만큼이나 처절하다. 환경에 적합한 하나가 후대에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서는, 하나의 돌연변이를 제외한 나머지 전체의 희생이 필요하다.

 환경이 변한다. 개체가 변한다. 개체의 포식자가 변한다. 결국 환경에 더 적합한 것이 살아남을 뿐, 경쟁자와의 경쟁에서의 승리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진정한 승리는 아니다.

 갑자기 기후가 더워지면 어떻게 될까. 갑자기 기후가 더워지면 기존의 식물들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물부족으로 인해 모두 도태된다. 이때 물 부족과 강한 햇빛 조건에 적합한 돌연변이 식물이 살아 남는다. 이 돌연변이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게 되는데, 이 돌연변이가 살아남게 된 이유는 바로 '커다란 키' 때문이다. 커다린 키는 수분 증발을 최소화하고 더 많은 햇볓을 포획한다. 또한 효율적인 광합성을 가능하게 한다. 높은 키는 바람에 의한 수분 증발을 줄이고 경쟁자와의 경쟁에서도 유리한 고지에 들어서게 된다. 반면 이 나무에 열리는 나뭇잎을 먹고 자라는 '기린'의 입장도 변화된다. 기존의 경쟁력은 더이상 경쟁력이 될 수 없다. 자신이 주로 먹던 식물들이 모두 말라 죽거나 높게 형성되자, 목이 긴 '돌연변이'를 제외한 나머지 식물들은 모두 도태되거나 굶어 죽는다. 이렇게 변화된 환경은 척박함에 익숙한 소수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 결국 소수는 다수가 되어 대세가 된다. 그것이 기린이 목이 길어진 이유이며, 호랑이의 발톱이 날카로워진 이유이고, 인간의 지성이 뛰어나게 된 이유다. 결국 결핍에 대한 적응력과 환경 변화에 대한 적응력은 어떤 경쟁에서보다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 할 수 있게 한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경쟁자는 '주변'이 아니라, 환경과 자신일 뿐이다. 

 한국인의 경우, 여러 민족 중 가장 눈이 작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부가 밝고 맑은 편에 속한다. 코는 짧고 얼굴은 둥글다. 당연히 한국인의 외형을 일반화 할 수 없으나 대체로 이런 특성이 많다. 이런 외형적 특성은 바이칼 호 주변의 찬바람과 같은 혹독한 환경을 견디면서 생겼다. 춥고 바람이 많이 부는 지역에서 생활하는 민족은 대체로 낮은 온도와 강한 바람에 대응하기 위한 신체적 특성을 발달시킨다. 눈이 작고 피부는 희고 얼굴은 동그랗다. 코는 코는 짭다. 시베리아에 서식하는 동물들 역시 두꺼운 체지방층과 짧고 넓은 몸통, 작은 눈을 가진다. 결국 하루와 한 달, 일 년이라는 차이는 어쩌면 무시해도 좋을 만큼의 작은 변화를 가져 올 수 있으나, 그것이 지속적이고 꾸준하며 반복적으로 환경에 노출된다면 그것은 장기적이 관점에서 꽤 가시적인 변화를 이끌어낸다.

 환경은 공간 뿐만 아니라 시간도 포함한다. 실제 과거와 현대의 한반도인의 외형은 달라졌다. 대표적인 변화는 평균 신장의 증가다. 20세기 중반 이후에 한국의 빠른 경제 발전은 식생활을 크게 개선했다. 이 결과 성장기 아동과 청소년의 신장은 과거에 비해 크게 달라졌다. 미적 기준 자체도 바뀌었다. 과거 미인 기준은 아담한 '입'과 '둥근 얼굴', '수수한 눈'이었다. 현대의 미는 그와는 정반대다. 두툼한 입술, 날카로운 턱선, 진한 눈꺼풀이 현대의 미의 기준이다. 이는 미디어의 발달로 미의 기준이 글로벌화 됐기 때문이다. 또한 성형 수술과 화장품 증가, 시술 등 다양한 기술적 요인도 한몫 했다. 현대에서 '외형'은 또다른 의미에 '경쟁력'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외모'만 가지고도 '큰돈'과 '영향력'을 갖는다. 불과 얼마 전인 과거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사회적 변화는 사람들이 외모를 경쟁력 중 하나로 여기게 했다. 이런 관심은 실제 사회적 현상이기도 하다. 이 사회적 현상은 흔히 '외모지상주의'라고 한다. 서양보다는 동양이, 동양 중에서도 '한국'이 유독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그 이유로 '관계를 중요시 하는 문화'에서 비롯된다. 통상적으로 쌀을 최초로 재배한 지역은 중국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후난성 옥천암 동굴에서 9000년 전 볍씨가 출토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한반도에서 발견된 소로리 볍씨는 약 1만 3천년에서 1만 5천년 전 것으로 밝혀져 중국 후난성에서 발견된 볍씨보다 2000년에서 4000년이나 앞서다. 이는 한반도의 쌀농사 문화가 얼마나 오랜 기간 지속 됐는지를 말해준다.

 쌀농사는 관개사업을 비롯해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는 공사를 필수적으로 필요로 한다. 이 과정에서는 '수직상하적' 관계를 중요시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형성을 몹씨 중요하게 여긴다. 쉽게 말해, 우리는 호칭에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 단번에 확인할 수 있도록 한다. 누구의 형제인지, 성별은 무엇인지, 나이는 누가 많고 누가 적은지, 이 모든 것을 한번에 확인할 수 있는 호칭을 따로 부른다. 그리고 그에 맞는 '술어'와 '명사'를 선택하여 '압존법' 등을 활용하여 관계 형성을 더 단단하고 견고하게 만든다.

 이렇게 관계를 세분화하고 그 위치를 명확하게 하는 언어는 기껏해봐야, 중국어와 한국어에 정도에서만 확인이 가능하다. 쉽게말해 고모, 이모, 숙모는 일본어에서 'おば'로 통칭한다. 또한 영어에서는 'aunt', 프랑스 말에서는 'tante'로 사용한다. 남자 형제와 여자 형제일 때도 손윗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 여동생, 남동생, 오빠, 언니, 누나, 형 등으로 구별된다. 이처럼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는 다른 이들보다 '체면'이나 '외모'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리가 지금의 우리가 된 이유는 아주 치열한 생존 매커니즘의 결과물이다. 이런 변화는 지금 이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 우리는 단기적으로 '경쟁자'를 이기기 위해, 발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환경에 적합 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독려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면 때로는 척박한 환경이 더 생존성을 키우는 강인한 '어머니'가 되는 경우가 있다. 고로 나의 생명력을 길러주는 것은 포근한 보금자리가 아니라 척박한 환경이다. 만약 내가 서 있는 환경이 척박하다면 그것이 나의 생명력을 길러주는 감사한 환경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거기에 적응을 할 수 있다면 말이다. 고로 생존은 '환경'의 탓이 아니라, 내 적응력의 탓일 수도 있다. 경쟁자에게 친 덫에 자신이 빠지지는 말자.  변화된 환경은 어쩌면 내 천적과 경쟁자를 모두 없애주는 최고의 환경일 수도 있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아동] 아이와 독서 습관_어몽어스 크루원의 일기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