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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Apr 10. 2024

[수필] 그냥 위로 받고 싶을 때_그냥 좀 잘 지냈으면

 어느 날, 눈을 떴더니 침침한 것이... 삭신이 쑤시는 것이...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는 노인이 된 꿈을 꾸었다. 베개에 머리를 대고 하늘만 꿈뻑 꿈뻑 쳐다 보았다. 이 길고 긴 시간이 언제쯤 끝이 날지, 전역날을 기다리는 말년 병장의 마음으로 지루하게 천장만 바라 보았다. 천장의 무늬에 온갖 서사를 갖다 부치며 동공을 비우고 한참을 있던 내가 꿈을 깨고 떠올린 것은 친할머니의 모습이었다.

 어린 시절, 친할머니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하는 농사일을 가끔 도와주셨다. 어머니, 아버지는 '거베라'라는 꽃을 작농하셨는데, 그 꽃잎이 가지런히 모이도록 플라스틱 컵을 씨우고 가지가 꺾이지 않도록 철사 하나를 꽂은 후에 파란색 테이프를 칭칭 감는 작업이었다. 할머니는 그 일을 도와주셨다. 정정하셨던 모습이 떠오른다. 기억의 부재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 간에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나름대로 삶을 살았다. 다시 살아난 나의 기억에 할머니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 TV화면을 보셨다. 채널은 항상 1채널이라 불리는 KBS였다. 한 칸만 내리거나 올리면 '오락프로'라고 불리는 프로그램이 많은데도 할머니는 가만히 1채널에서 방송하는 편성을 그대로 시청하셨다. 크게 웃지도 않으셨고 어떤 반응도 하지 않으셨다. 할머니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 나는 거기에 앉아 TV화면을 배경으로 한 할머니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그것이 나의 다음 기억. 이어지는 기억의 부재 뒤, 할머니의 모습은 천장을 보고 계셨다. 그 공간의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온전히 함께 시공간을 채우던 시기는 지나갔고 나의 손에는 다른 세상에 연결되는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다. 그 화면을 들여다보면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 있었다. 그것을 호주머니에 집어 넣으면 초침과 분침은 속도감을 온전히 전하려는 듯 천천히 흘렀다. 그 견디지 못할 지루함을 반대쪽에서 할머니는 어떻게 보내고 계셨을까. 그 느리게 흘러가는 공간을 벗어나면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스마트폰에서는 알림이 끊임없이 왔다. 친구들의 농담은 공간을 달리해서도 이어졌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이들의 시덥잖은 농담과 이야기가 끊임없이 흘렀다. 나의 하루는 그 방향 전환이 빨랐다. 동으로 갔다가 서로 갔고 다시 북으로 갔다. 하루와 하루의 결정으로 인생의 방향이 크게 달라졌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가끔 그 기억의 부재와 부재 사이에 어럼풋한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를 때가 있다. 할머니의 시간은 무엇으로 채워졌을까. 음악도 듣지 않고 TV도 스마트폰도 없는 방에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됐을까.

 10대에 나는 이별이나 상실에 대해 깊은 상처를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이별보다 만남이 더 흔하고 잦은 나이였다. 이별과 상실을 겪으면 새로운 인연이 그 자리를 채웠고 다시 이어서 새로운 인연이 그 자리를 매우고 채우고 넘쳤다.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났고 그러다보면 비어진 자리를 느낄 새는 없었다. 스물이 넘어서는 그 '만남'과 '이별'의 분기점이 갈라졌다. 점차 만남과 이별의 횟수가 평행을 이루었다. 어떤 이별에는 그것을 채우는데 한참의 시간과 인연이 필요했다. 서른이 되고 이제 마흔에 닿는 나이가 되면서 점차 '새로운 인연'보다 '사라진 인연'이 많아짐을 느꼈다. '결혼식', '환영식' 보다 '장례식'이나 '송별회'에 참석하는 일이 많아졌고 어떤 경우에는 만나는 사람에 '정'을 두는 '감정 소모'를 피하게 됐다. 이미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갔고,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은 그 자리를 채워내지 못했다. 사회적으로 풋내기에 속하는 마흔 언저리가 느끼는 건방진 상실감은 과거 '할머니'를 떠올리면 숙연해진다. 괜히 시간을 축내서 채워진 '나이'가 아닌 상실감으로 가득찬 나이. 그것을 오롯하게 감내한 나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자신을 키워주던 부모와도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난 '자식'과 작별하고 일했던 이, 친구, 반려자와도 이별하하여 점차 혼자가 되는 시기가 되면 나의 시간은 무엇으로 채워질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볼 때가 있다. 내가 채워야 하는 것은 그저 '숫자'에 불과한 '자산'이나 '인맥'이 아니라, 어느 순간 유일하게 남게 될, '나'와 '기억'이 아닐까.


 나에게만 있을 것 같다는 '이별'과 '상실'을 사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공유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대략 인생의 절반인 마흔에 알게 됐다. 밖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비슷한 기억을 갖고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또한 그들에게 남은 시간과 나에게 남은 시간은 여전히 '상실'과 '이별'이 훨씬 더 많을 거라는 것도 안다. 모두가 상실하며 살아가는 시대에서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누구에게도 함부로 할 수 없다.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적 있다. 별 생각없이 던졌던 나의 말을 꽤 가슴 깊은 곳에 담고 사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그는 가끔 나에게 그 기억을 말하곤 한다. 나에 이야기에 꽤 적잖은 힘을 얻었던 모양이다. 그의 그 환상을 깨지 않기 위해 나는 입을 다물었지만 내가 그에게 던졌던 말은 그저 대책없이 던저진 '위로'에 불과했다. 상대가 '잘 해 낼 수 있을지, 앞으로 더 잘 될 거라던지', 나는 알 수 없다. 나의 미래도 모르는 망정, 상대에게 던졌던 대책없는 위로가 누군가에게 힘이 됐다. 모든 위로하는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무게도 감당하지 못하면서 감히 누군가의 미래를 긍정한다. 그러나 그 거짓 위로는 위약이 만들어낸 '플라시보'처럼 가짜 효과를 만들어내어 상대를 치료한다.


 삐뚤빼뚤 자전거를 타면서 뒤에서 잡아주는 손이 놓지 않을 거라는 믿음은 혼자 타는 자전거를 앞으로 나가게 만든다. 믿을만한 이의 선한 거짓말은 때로 불가능을 아무렇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우주에 인간을 보내 도시를 건설하는 것 만큼이나 누군가에게는 '자전거 처음타기'가 불가능한 일이며 그 불가능의 영역은 사실 모든 '처음하는 일'에 드리워져 있다. 우리는 모두 미래라는 모두가 처음 경험하는 '불가능'에 맞딱드리며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위약'의 효과에 감탄한다. 때로는 의미없고 진심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불특정 다수에게 던지는 메모에도 우리는 위로하며 힘을 얻는다. 잘 모르는 미래에 대해 잘 모르는 이의 막연한 응원을 받고 힘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은 가끔 보면 불가능했던 거의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아마 내가 속았던 선의의 거짓말처럼 나의 선의의 거짓말도 누군가를 속여 불가능을 가능하게 바꿀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우울'과 '상실'의 늪에서 아무렇지 안게 건져낼지도 모른다. 고로 나는 누가될지 모를 상대의 불행과 우울, 상실에 대해 이렇게 장담하고자 한다.


 내가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장하건데, 당신의 미래는 아름다울 것이다. 모두 잘 될 것이고 그러기 위해 그러고 있는 것이다. 분명하다. 틀림없다. 내가 보장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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