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인환 May 10. 2024

[철학] 동양이 말하는 '선과 악', 왜 계선하는가_명

 명심보감은 '계선'을 시작로 한다.

날때부터 사람은 선한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교육을 통해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맹자의 '성선설'을 전제로 한다.

 '하늘'은 선한 자에게 복을 주고, 악한 자에게 '벌'을 준다. 아이에게 원문과 뜻을 읊어 주었다. 그 뒤로 아이의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다. 강조하여 말한 것도 아닌데 아이는 '하늘'을 두려워했다. 그 '전지전능함'에 나약한 '인간'으로 발가벗겨진 느낌은 때로 불필요한 수치심을 만들기도 했다. 나또한 어린 시절에 '하늘'이 두려웠다. 숨을 곳 없이 살피며 상벌을 내리는 자에게 순종하려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 시야가 좁아졌다. 제 아무리 밝은 빛이라 해도 접시 밑까지 밝힐 수는 없다. 모두를 밝혀도 빛들지 않는 곳이 있음을 알고 '계선'하지 못했다. 가지고 있는 '선'함은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언제든 잃어버릴 수 있기에 어떻게 그것을 이어 갈 수 있느냐를 연구해야 한다.

 가만히 떠올려보면 어린시절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무도 없는 시골길에서 횡단보도가 없으면 수백 미터를 더 걸어 가고서 건너곤 했다. 사람들의 '의도'를 의심치 않고, 때로 나를 속이는 사람들을 끝까지 믿으며 되려 손해보는 것이 편한 사람이었다. 그때의 모습을 돌이켜 보건데, 나는 틀림없이 퇴화했다. '계선'하지 못했다. 하늘이 바라 볼 지언정, 눈이 없으면 슬금슬금 모르쇠하고 때로 누군가의 뒷담화 자리에 신나게 침을 튀기기도 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이립하고 불혹하며 지천명하고 이순한다는데, 되려 퇴보해가는 스스로를 보며 '성선설'이건, '성악설'이건 '교육'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교육은 암기하여 머리에 집어 넣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익히는 일이다. 학습에서 학은 하나, 습은 열이다. 한 번 배우는 것보다 열 번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머리로 집어넣고 행동으로 꺼내지 못한 '무지'가 스스로를 망치고 있었다.

 한 번은 아이가 말했다. 빨간불에는 멈추고, 파란불에는 가는 거란다. 알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은 노란불이라고 했다. 아이는 말했다. '노란불'이란 '주의'하라는 의미란다. 어설프게 걸린 순간을 핑계 삼아, 가속페달을 밟던 오른발이 민망했다. 과연 나의 오른발은 '모르고 그랬는가' 분명한 건, 나이가 들면서 점차 '하면 안되는 것' 중 '해보니 별일 없더라'가 많아졌다.

 커다란 범죄가 아니라면 잠깐 스스로를 속였다. 속이는 줄도, 속는 줄도 모르고 속였다. 학습은 그런 방향으로 진화했다. 해보니 생각보다 별일 없더라...

 이런 학습이 하나 둘 쌓이자, 좋지 못한 '습'이 생겼다. 고쳐야 하는 '습관'이 쌓여도 머리로 알며 몸이 다르게 움직이는 '모순'이 생겼다. 몸과 마음의 차이는 미세하게 시작하여 광활하게 벌어졌다. 본디 그것이 하나처럼 붙어 있었다는 사실도 지각할 수 없었다.

 '인지부조화'

 나에게 찾아온 '인지부조화'는 결국 신나게 달리던 가속패달을 멈추게 했다. 다음 '나이'로 나아가는 방향에 '노란불'이 들어와 있었다. '주의'하라는 의미다. '주의는 무슨...', 가속 페달을 더 힘껏 밟으며 '마지막 기회'를 통과하고 있었다. 결국 몇 분의 시간을 아낀다는 핑계로 내가 하고 있던 건, 양심을 팔아 1분쯤 먼저 도착하여 허송세월을 보내는 일이었다.

 삶이 시간으로 쌓여가는데, 도착 후 1분을 위해 진행하는 1분을 갔다 버렸다. 무게의 가치가 1g도 다르지 않지만 가치를 다르게 매기고 후의 1분을 위에 앞의 1분을 버렸다. 조삼모사 선택을 하느라, 내가 허비한 것은 '양심'이었다. 그것은 '악'이다.

 '선과 악'을 말할 때, 우리는 이분법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동양에서 '선'과 '악'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악(惡)은 으뜸 밑에 버금(亞)을 뜻한다. 우리 마음(心)에 있는 두 번째를 '악(惡)'이라 한다. '선'의 반대쪽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선' 뒷편에 서 있는 그것이 '악'이다. 다시 말해, 완전히 선의 반대쪽이 아니라 바로 그 다음을 말한다. 선(善)도 단순히 착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선(善)'은 양(羊)과 눈(目)으로 이뤄져 있다. '양'은 '개' 다음으로 인간에게 오래 길들여진 동물이다. 양은 아주 작은 식량만으로도 생존이 가능하고 사회적 동물이기에 대규모로 키우기도 유리하다. 이중 '양털'은 생존에 매우 필요했다. 양은 '의'가 되기도하고 '식'이 되기도 했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에 따르면 인간은 양을 기르며 순종하는 양만 남기고 모두 죽여 버렸다. 이런 과정에서 양은 꽤 순종적인 동물이 됐다. 게다가 '양'은 매우 시력이 나쁜 동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분별력이 없고 쉽게 따라다니며 복종한다. 이런 특성은 '신' 앞에 놓인 '인간'을 닮았다. '인간'의 보살핌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양'을 보며, '인간'은 '신' 앞에 놓인 '자신'을 바라봤다. 그런 의미에서 '양'은 신에게 제물로 종종 쓰이곤 했다. 우리가 말하는 '희생양(犧牲羊)'은 이렇게 신 앞에 제물로 받혀진 '양'을 말한다.

 선, '따르는 것', 악 '그 다음의 생각'.

선과 악은 천사와 악마라는 고밀도의 인격의 집합이 아니다. 따르는가, 혹은 그 아래의 유혹에 흔들리는가. 그 작은 차이가 만들어낸 구분이다. 가만히 보면 나의 어린 시절은 꽤 따름의 방향에서 시작했다. 점차 몇 번의 옳지 못한 선택과 경험들은 굳이 '따르지 않아도 되는 기억'을 만들었고, 그것은 '선'의 '다음' 그것이 됐다.

 '명심보감', 마음을 비추는 보배로운 거울.

 거기를 들여다보니, 나의 온전한 민낯이 들여다보였다. 여하면 다음의 마음에게 쏠리고 마는 어리석음이 보였다. 나를 비추고 수신하여 '선'을 이어야겠다는 다짐이 든다.







작가의 이전글 [경제] 절세와 탈세는 분명 다르다: 상속세_부의 이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